안중근은 대구서 이토를 저격하고 싶었지만 ‘황제가 일행에 계시니…’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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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2-21   |  발행일 2012-12-21 제35면   |  수정 2012-12-21
대구GEO 자문위원 정만진의 팩션 : 황제의 눈물
안중근은 대구서 이토를 저격하고 싶었지만 ‘황제가 일행에 계시니…’
안중근은 대구서 이토를 저격하고 싶었지만 ‘황제가 일행에 계시니…’
1909년 1월12일 달성공원에서 열렸던 순종황제 환영식. 군중이 도열해 있고 솔잎 등 나뭇가지로 만든 환영아치, 일장기가 있으며 만막이 옛 대구시가지를 가리고 있다.(위)

달성공원에서 열린 환영행사를 보기 위해 밀집한 군중.


1. 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자

1907년 2월 하순 어느 날, 안중근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은 평양 명륜동에서 연설을 했다. 마당에는 선비 1천여명이 모여 있었다.

안중근은 ‘국민들이 돈을 모아 나라빚 1천300만원(지금 돈 300조 정도)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니 우리도 피와 땀을 모아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저는 아내의 장신구부터 먼저 헌납하겠습니다.”

언행일치와 대의를 목숨처럼 중시하는 선비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일제가 그것을 가만 놔둘 리도 없었으니, 결국 1908년 가을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안중근은 생각했다. ‘1884년 이래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아래 청계동에 살다가 1906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전재산을 정리해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열어 민족교육을 했고, 국채보상운동도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뜨겁게 펼쳤다. 하지만 길은 어두웠어.’그래서 결심을 굳혔다.

‘의병 투쟁이 정답이야! 무장 독립전쟁을 해야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자주자강을 할 수 있어!’

해외 망명을 결단했다. 서울 명동성당 근처 제중원에 머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1907년 8월1일.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다. 안중근의 마음이 더욱 돌처럼 단단하게 변한 건 그날 이후였다. 물론 안중근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보내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다’ 실패한 고종이 강제로 왕위에서 밀려나고, 퇴임왕도 신임왕도 참석하지 않은 황제 취임식에서 떠밀려 등극한 순종이 군대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등을 일본에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정세는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5개 대대부터 해산되자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39세의 나이로 절망해 자결했다. 탄약도 몇 없는 구식총을 든 병사 700여명이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다가 남상덕 등 68명이 살해되고 100여명이 부상, 500여명이 포박되는 광경을 지켜본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는 포성이 약간 멎었을 때 안창호, 김필순 등과 함께 미국인 의사들과 십자표를 달고 싸움터에 뛰어들어 부상자를 부축, 무려 50명을 입원시켰다.

그러나 뱃속까지 뒤집어지는 분노는 참을 수 없는 불길이었다. 8월1일 당일 그는 간도를 향해 망명길을 떠났다. 그 후 의병참모중장(義兵參謀中將)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그렇게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1909년 초, 북풍한설 살벌한 함경도 갑산에서 안중근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 황제를 겁박하여 1월9일 대구를 방문한다.’‘1월1일 경부선이 개통되었는데, 그걸 핑계로 이토 히로부미가 황제의 순행을 밀어붙였다.’ 맨살로 찬바람을 맞고 있던 안중근에게 문득 온몸을 살얼음물에 집어넣는 듯한 깨달음이 왔다. 동지들도 그와 같았는지, 말들이 터져나왔다.

“황제 순행을 강행한 일본이 조선인들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에 퍼뜨리려는 인식은 뻔한 거야. 일본이 얼마나 조선을 발전시키고 있는지 알겠느냐! 조선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나라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조선이 일본 것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느냐! 어찌 우리가 그 꼴을 두고만 볼 건가!”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를 방문하는 중에 죽이기로 결의했다. ‘총을 준비하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을 심판하라고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게야!’

안중근은 대구서 이토를 저격하고 싶었지만 ‘황제가 일행에 계시니…’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연필일러스트=김성태 화백



2. 대구읍성 부순 박중양은 신작로를 내고

1월11일 밤, 지금의 대구시장 격인 박중양은 쾌재를 불렀다. 지난 7일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를 찾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왔다는 번뜩임이 일었던 것이다. 7일에는 황제 일행이 대구역에서 경상감영까지만 오갔다. 거리가 짧았다. 게다가 시내만 왕복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달성공원까지 오간다고 했다. 민족의 사적인 달성(達城)을 뭉개기 위해 공원화하고, 또 신사까지 지어놓은 곳으로 황제를 데려가 참배를 시키려는 것이다.

박중양은 ‘황제 신사참배를 내가 왜 궁리하지 못했을까!’ 한탄도 했지만, 곧 잊었다. 모름지기 만사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법 아닌가.

박중양은 대구에서 행세깨나 하는 인물을 다 모았다. ‘이토 히로부미 각하의 양자라고 소문난 내가 아닌가. 각하와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를 널리 알려 장차 대구에서의 내 위상을 반석처럼 굳힐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폐하와 각하께서 내일 달성공원을 찾으신다 하오. 그런데 광명사 남쪽부터 달성공원까지는 어가가 지나갈 만한 길도 없소. 어찌 논두렁길을 가실 수 있겠소. 게다가 감영에서 광명사 사이는 집과 상점이 많아 호위가 어렵고, 달성공원까지는 거리도 멀어서 의병을 자칭하는 적도들이 출몰할 위험이 많소.”

박중양은 군대를 불러 광명사(光明寺) 동쪽의 들길을 밤새 신작로로 닦으라고 지시했다.

“길에는 하얀 모래를 깔고, 여기저기 낡은 집들은 부수어라. 지저분한 것들은 천으로 덮고!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폐하와 각하께서 보시기에 좋아지고, 개미새끼 한 마리까지 움직이면 다 드러나게 된다. 암, 호위군 백만 명을 배치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지.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냐!’

뒷날 일본인이 쓴 어떤 책은 이 장면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기술했지만, 박중양은 본래 역사의 평가 따위야 내 알 바 아닌 위인이었다. 과연 박중양은 다음날, 기대한 바와 어긋나지 않게, 순종 아닌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찬사를 들었다. ‘역시 훌륭해! 머리 좋고 충성심이 뛰어나!’



3. 이 많은 백성이 일장기를 흔들다니!

순종은 가마를 타고 그 길을 갔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은 말 등에 올라 있었다. 신작로 양옆은 “성수 만세”를 외치는 4만여 백성들로 가득 찼다. 대구 인구가 3만 명 정도 되는 걸로 들었던 순종은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순종을 더욱 당황하게 한 광경은 그들 중 상당수가 일장기를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백성들은 그저 순종이 일본으로 납치되지 않고 무사히 대구로 돌아온 사실만으로도 열광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황제는 그것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다.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 옆에 붙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자가 제일 눈에 거슬렸다. ‘아바마마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대구읍성을 부순 박중양이 아닌가. 대략 20년 전(1888년) ‘샤를 바라’라는 프랑스 사람이 베이징성을 축소해놓은 듯 아름답다고 찬탄했던 대구읍성을 왜인들 장사하는 데 도움주려고 파괴한 놈이야. 대구 백성 수만 명 중 저 놈을 처단할 의인이 하나 없단 말인가.’

하지만 순종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지금 일인들이 입으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 아니한가. 곤룡포도 못 입은 나를 백성들이 저렇듯 환영을 하고 있는데 황제 된 자로서 어찌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때 누군가가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 저기 수창학교 남쪽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서상돈, 김광제 등 대구의 선비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광문사입니다.”

문득 그 말을 들으니 황제의 내심은 다시 변했다. ‘내 비록 직접 지방의 형편과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순행한다고 공언했지만, 이등박문과 함께 길을 나서면 의병이 있어 총을 쏘는 일도 생기려니 은근히 기대를 하였다. 지금 일본 군사들이 엄청나지만 그래도 세상이 갈라지는 총소리가 듣고 싶구나.’

황제는 남몰래 주위를 살폈다. ‘옷자락에 총포를 감춘 백성이 저 많은 인파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죽어도 좋으니 누가 하늘과 땅을 부수는 굉음을 울려다오.’

어가는 아홉 살 이상화가 공부를 배우고 있는 우현서루(友弦書樓) 옆을 지나더니 어느덧 다리를 건너 달성공원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 다리를 뒷날 사람들은 어행교(御幸橋)라 불렀다. 임금이 지나간 다리라는 뜻이다.



4. 눈물을 흘리며 기념식수 하는 순종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달성공원 한복판에서 기념식수를 하게 되었다. ‘

‘도대체 무엇을 기념한단 말인가?’

향나무 두 그루가 앞에 놓였다. 문득 순종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토 히로부미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자. 혹여 내가 상할까봐 총을 못 쏘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잽싸게 이완용이 말했다. ‘폐하, 거기서는 식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각하 가까이 오십시오.’황제의 눈가에 애잔한 물기가 살짝 번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못 본 체 미소를 머금었다.



5. 브로닝 세 발, 한민족의 자존심을 떨치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5분, 브로닝 7연발에서 뿜어져 나간 세 발이 하얼빈 하늘을 울렸다. 우리의 존재를 확연히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킨 총성이었다. 일장기를 휘두르며 외쳐대는 일인들의 만세소리와 군악대의 환영곡에 파묻힌 채 의기양양하게 걸어나오던 이토 히로부미는 곧 절명했다.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밝히고 일제 침략의 죄악상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었으므로 도망치지 않고 현장에서 일부러 붙잡혔다.

순종은 뒷날, 사형을 앞둔 안중근이 “총도 못 구했고, 길이 너무 먼 데다 호위 군사가 많아 성공하기 어려웠지만, 그보다도 황제께서 일행에 섞여 계시는데 어찌 저격을 하겠느냐”고 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고리를 안에서 걸었다. 그날 황제의 눈물을 본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도.

정만진(소설가·영남일보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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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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