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양형기준이 뭐길래? 법과 상식 사이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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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13   |  발행일 2020-10-13 제23면   |  수정 20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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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1
갓 성인이 된 그의 손에서 아동 성착취 영상물 사이트가 만들어진다. 세계 최대라는 그 사이트엔 생후 6개월 유아에 대한 성착취 영상마저 올라있었다고 하니 그 끔찍함을 다 필설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5년부터 2년8개월 동안 사이트를 통해 그가 벌어들인 돈은 무려 4억여원으로 추정되며, 사이트 이용자만 32개국 128만명에 달할 정도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한국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선고받은 형량은 1년6개월에 불과하다. 그는 '웰컴 투 비디오'운영자 '손정우'다. 1심 판결에서는 손정우가 "어리고, 범죄전력도 없고, 범행을 시인하며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2심에서는 재판 다음날 손정우 측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는데,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는 점이 양형에 반영되어 그마저도 반으로 줄어든 1년6개월 실형에 그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손정우의 형량을 '신박하게' 줄여준 혼인신고는 상대방의 혼인무효소송으로 현재 취소되었다고 한다.

#2
2009년 12월 성범죄 전력이 있던 남자가 등교 중이던 1학년 8세 여자아이의 목을 조르고 성폭행해 장기파손 등 심각한 상해를 입히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1심에서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1심 법원은 '술에 취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라는 이유로 징역 12년형을 선고했다. 그는 오는 12월13일 출소를 앞둔 '조두순'이다.

최근 미국의 30대 남성 매슈 타일러 밀러가 상습적으로 아동성착취물을 제작한 혐의 등으로 징역 600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5세 이하 아동 2명 등을 상대로 성착취물 100여개를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손정우 사건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형량이다. 600년이란 형량은 그가 소지했거나 제작한 아동 성착취물을 건별로 형량을 모두 더해 나왔을 것이다. 영미법 체계에서는 피고인이 여러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각각의 형량을 합산해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이 '미국 법원이 부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성폭력상담소에 후원금을 기부하면서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감형된 사례가 나오자 여성단체나 성폭력상담소 등에 후원금을 보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성범죄 'n번방'사건의 주범 조주빈은 조금이라도 형을 줄여보기 위해 매일 한 장씩 무려 100장에 달하는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법정이 피고인의 반성과 뉘우침을 감형 요소로 삼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양형위원회가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을 확정했다. 기준안에 따르면 최고형량을 29년3개월로 늘리는 등 솜방망이 처벌이라 비판받던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건을 최고형으로 선고할 가능성은 없다. 여전히 이러저러한 사유로 감형되는 사례들을 보게 될 것 같다. 손정우처럼 초범이라서, 부양가족이 있어서, 조두순처럼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여서, 때론 피해자와 합의를 했기 때문에 등등 감형의 이유는 많기도 하다. 최고형이 얼마인가보다 더 중요한 건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나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온정적 판결이 내려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을 미국 법정에 보내서라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자는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으려면 일반상식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법의 간극을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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