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국민은 'Bespoke 정치'를 원한다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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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6-03   |  발행일 2021-06-03 제22면   |  수정 2021-06-04 07:20
국회·행정 아직 공급자 중심
법안 단독처리, 聽聞 무력화
국민의힘 경선 이준석 돌풍
과거 회귀·구태 정치 백래시
세금 거두듯 민심 추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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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삼성 가전 브랜드 '비스포크' 돌풍이 거세다.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생활가전의 비중이 높아진 것도 비스포크의 성과다. 비스포크(Bespoke)는 소비자가 말한 대로, 즉 소비자 주문형이다. 영국 담배 던힐은 Bespoke 전략에 정통하다. 1907년 작은 담배가게에서 출발한 던힐은 한 세기 동안 무려 3만7천개의 레시피를 만들었다.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에 부응했단 뜻이다. MZ세대를 겨냥해 가향 캡슐 담배를 개발한 곳도 던힐이다.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IPTV 셋톱박스를 구동시키는 LG유플러스의 OTT '자동연결기능' 역시 Bespoke의 결과물이다.

Bespoke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수요자 중심' '소비자 맞춤형'이다. 기업이 일찌감치 고객 중심주의로 변한 데 비해 우리 정치·행정은 여전히 공급자 편의주의에 빠져 있다. 국회와 정부의 Bespoke 기능은 고장 난 모양이다. 바람직한 민주정부는 여당의 협치, 야당의 생산적 비판, 관료의 합리적 정책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정부다. 현실은 딴판이다. 우선 협치가 작동되지 않는다. 여당의 법안 단독 처리는 다반사였고 국회 인사청문회는 무력화된 지 오래다.

야당의 견제도 헛발질이 많다. 민심 대변보단 정략에 치우친 느낌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현재 속도라면 집단면역이 6년 걸린다는 얘기도 있다"며 정부의 백신 대책을 힐난했다. 6년? 공감할 국민이 있을까. "~얘기도 있다"는 어법을 썼다는 건 제시할 근거가 없다는 의미다. 어떤 정치인은 전체 맥락은 보지 않고 소득과 자산을 구분하지 못한다며 시비를 건다. 쪼잔한 언설이자 말꼬투리 잡기다.

당심(黨心) 우위도 마뜩잖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 룰이 그렇다. 본경선은 당원 투표 70%, 국민여론 30%가 반영된다. 이마저 역선택 방지 조항을 둔데다 호남 할당 비율은 2%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영수 산림(山林)은 사림(士林)의 여론인 청의(淸議)를 공론화해 세력을 키웠다. 산림의 권력은 사림의 여론에서 나왔던 것이다. 특정 세력이 여론을 주도했단 얘기다. 오늘날 정당의 당심이 청의에 해당한다. 하지만 청의는 민심이 아니다. 민주당도 '문빠' 같은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면 민심이 착근할 여지가 없어진다. 정치 소비자는 당원이 아닌 국민이다.

'이준석 현상'은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민심의 표출이다. 아직 민주당은 '친문' 냄새가 폴폴 나고, 국민의힘은 '도로한국당' 색채를 지우지 못했다. 과거의 정치 문법으론 민심을 독해할 수 없다. 이준석 돌풍은 과거 회귀, 구태 정치에 대한 백래시(backlash)다. 메타버스(metaverse)에서 자신의 아바타에게 명품 옷을 사 입히는 시대에 장유유서는 고루하고 계파 논쟁은 한가하다.

국민 다수가 탈원전과 친노조 정책에 반대한다. 반중 정서도 비등하다. 이를 정치와 정부 정책에 반영하는 게 Bespoke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엔 비스포크가 없다.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에 달빛내륙철도를 제외시켜 대구와 광주의 주문(注文)을 뭉갰으며, 가덕도 신공항을 밀어붙여 대구경북 민심을 외면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가세했다. 국민 접근성을 내세우며 '이건희 미술관'의 수도권 건립을 시사했다. 지자체의 과열 유치 경쟁은 엄청난 국고 낭비로 이어진다는 궤변까지 늘어놨다.

흔히 나쁜 언행엔 '~질'이란 접미사를 붙인다. 갑질, 패악질, 첩질 따위다. 저급한 정치, 정파적 정치는 정치질로 폄훼돼 마땅하다. 국민은 정치질을 사양한다. 'Bespoke 정치'를 원한다. 그러니 세금 징수하듯 민심을 추렴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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