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정치 고수는 '닥공'을 경원한다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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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01   |  발행일 2021-07-01 제22면   |  수정 2021-07-01 07:46
정치 9단 김대중의 '절제'
시대의 화두 읽는 이준석
윤석열, 文정부 비판 치중
정책·비전·미래 제시 못해
정치 筋力 키워야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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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바둑 최고수는 9단이다. 10단은 없다. 9단이면 '반상(盤床)의 신(神)'이다. 9단에 '입신(入神)' 칭호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 9단이 있다. 정치 최고수라는 의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 9단이다. 언론과 정치계는 김대중 외에 누구에게도 '정치 9단'의 품계를 주지 않았다.

김대중의 언변은 화려하다. 논리적이며 조리 있고 설득력까지 갖추었다. 1971년 대선 때 서울 장충단공원에서의 명연설은 김대중 정치력의 백미다. 하지만 김대중은 '닥공(닥치고 공격)'을 경원한다. 상대를 비판할 때도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절제된 공격이다. 공화적 가치를 공고히 다진 의회민주주의자다웠다. 대통령이 된 후엔 통합에 방점을 찍었다. 은원(恩怨)만 따졌다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약속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라면 굳이 네거티브는 필요 없다. 상대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에 맛을 들일수록 '닥공' 성향이 강해진다.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만 해도 그렇다. 문 대통령은 미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백신 파트너십, 한미 미사일 지침 폐기 같은 굵직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미 결속으로 대중(對中) 편향외교를 탈피하는 전기도 마련했다. 하지만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바이든 대통령을 폄훼하면서까지 문 대통령의 방문 성과를 디스했다. 아주 신랄하게. '닥공' 또는 '억까(억지로 까기)'다.

소셜 미디어엔 "44조원 주고 고작 백신 55만회분 받고"란 비아냥이 나돌았다. 아니 미국 투자가 그냥 공짜로 주는 건가. 44조원 투자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면 결국 국부(國富)로 돌아오지 않나. 당시 "무능한 정부야, 비겁한 정치야"란 멘트를 날린 권영진 대구시장도 과했다. 광역단체장이 쓰기엔 도발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 출사표는 지지율 1위의 무게만큼이나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정치적 내공을 보여주진 못했다. 곳곳에서 정치 초보의 밑천이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 비판에 치중한 나머지 윤석열만의 정책과 비전, 미래를 제시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실패는 이미 국민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를 중언부언하는 건 식상하다. 게다가 용어 선택에 결함이 많았다. "무도한 정권" "국민 약탈" 같은 정제되지 않은 원색적 어휘가 난무했다. 스마트·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언어 구사가 아니다. 차라리 '닥공'에 가까웠다.

'시대정신'을 비켜 간 것도 아쉽다. 지금 시대정신은 변화와 혁신이다. '혁신 대한민국'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면서 가치 혁신, 제도 혁신, 기술 혁신, 정치 혁신이란 담론을 던졌으면 어땠을까 싶다. '상식과 공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하드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는 없었다. 공정을 실현할 구체(具體)는 보이지 않았다. 한일관계를 묻는 일본 NHK 기자의 질문에 "이념편향적인 죽창가를 부르다가 망가졌다"고 말한 것도 부적절했다. 한일관계 악화의 책임은 일본이 더 크지 않나.

나이가 어려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훨씬 고수다. 정치의 맥을 짚을 줄 알고 시대의 화두를 읽을 줄 안다. '닥공' '억까' 스타일도 아니다. 중도층과 호남 쪽에 구애를 마다치 않는다. 외연 확장을 염두에 둔 포석일 게다. 아마도 정치 7단쯤 되지 않을까 싶다.

윤석열은 정치 이력이 없다. '정치 근력(筋力)'을 키우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경선 및 본선의 혹독한 자질 검증을 버텨낼 수 있다. 마이크 앞에서 말하며 계속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습관도 고쳐야 한다. 지지율 1위의 대선 출사표는 기대보다 우려를 낳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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