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11] 중국 여산 동림사, 운무 뒤덮인 中 정토종의 본산 '화합의 메시지' 떠올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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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04   |  발행일 2021-10-04 제21면   |  수정 2021-10-04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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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시성 여산에 있는 동림사의 대웅보전. 동림사는 중국 정토종 개산조인 혜원 스님과 관련한 '호계삼소' 고사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다.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이 있다. 동양화의 유명한 그림 소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호계삼소도'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려져 왔다. 그림 소재뿐만 아니다. 시나 수필의 소재로도 활용되고, 모임이나 거처의 명칭 등으로도 애용된다. 호계삼소 고사가 이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호계삼소'는 1천600여 년 전 일이다. 당시의 최고 지성인 세 사람, 즉 불교·유교·도교를 대표하는 유명 수행자 세 사람이 동림사에서 만나 자리를 함께했다. 동림사 스님이 다른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배웅하는데, 서로 마음이 잘 통해 이야기에 몰입하다 스님이 스스로 정해놓은, 넘어서는 안 될 호계를 넘어선 사실을 알고 세 사람이 함께 파안대소했다는 고사다.

서양으로 치면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대표자들이 만나 서로 갈등하고 전쟁할 것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함을 절감하고 공감한 자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바를 담고 있는 고사라고 할 수 있겠다.

170여 봉우리 30여개의 폭포·호수
수많은 시인·예술인 선망의 대상
도연명·백거이 등 1500여명 방문
4000여 수의 시문과 그림 등 남아
산수화 대가 겸재 정선의 작품도

유교·불교·도교 수행자 일화담은
'호계삼소' 고사성어 탄생하기도


이 호계삼소의 일화가 탄생한 곳이 중국 장시성(江西省)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다. 호계삼소 일화를 알고 있고, 글을 쓸 때 인용하기도 했다. 이 일화가 탄생한 동림사가 어떤 분위기인지, 호랑이가 지키고 있었다는 호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2019년 10월에 동림사를 가볼 기회가 있었다. 자동차가 사찰 바로 옆 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가 놓인, 작은 개울인 호계 옆에는 상점 거리가 형성돼 있었다. 호랑이가 근처에 있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약간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사찰 주변을 깊고 큰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당시에는 호랑이가 충분히 출몰할 만한 곳이라 생각되긴 했다.

◆중국의 명산 여산

동림사는 그 아래에 있는 서림사(西林寺)와 함께 여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동림사는 동진 시대 승려인 혜원(334~416)이 창건했다.

여산은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산이다. 최고봉인 한양봉(1천474m)을 비롯한 170여 봉우리, 파양호 등 14개의 호수,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한 구절인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으로 유명한 삼첩천(三疊泉) 폭포 등 20여 개의 폭포가 있다. 예로부터 시인과 예술가, 종교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여산은 2천 년 전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산이기도 하다. 도연명, 이백, 백거이, 왕안석 등 1천500여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곳을 찾아 4천여 수의 시문과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여산의 빼어난 산수는 운무에 뒤덮여 있어 그 진풍경을 보기 어렵다는 데서 '여산 진면목'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소동파가 49세에 여산을 찾았을 때 지은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이다.

'좌우로 보면 고개이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가 되며(橫看成嶺側成峰)/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遠近高低各不同)/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不識廬山眞面目)/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지(只緣身在此山中)'

여산의 아름다운 풍광은 중국 전원시의 탄생지가 되고, 산수화의 발원지가 되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도 여산폭포도와 여산초당도를 그릴 만큼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여산이 속한 구강(九江)이 고향인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전원생활을 즐기며 읊었던 시 '음주(飮酒)' 20수 중, 가장 유명한 제5수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에서 '남산'이 바로 여산이라고 한다.

여산은 혜원(慧遠)이 동림사를 개창해 정토종의 본산이 되었고, 육수정(陸修靜)은 여산에서 도교의 일파를 개척했다.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인 백록동서원도 여산에 있다. 유·불·도의 발상지이자 문화를 꽃피운 터전인 셈이다.

◆호계삼소 이야기

혜원은 이런 여산을 가장 여산답게 만든 주인공이다. 혜원이 여산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란을 피해서였다. 여산으로 들어온 그는 386년 여산의 향로봉이 마주 보이는 동림산 아래에 동림사를 열었다. 혜원은 이곳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36년 동안 염불 수행과 중생 교화에 전념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동림사 아래로 '호계(虎溪)'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혜원은 평소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跡不入俗)'라는 글귀를 걸어두고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는 찾아온 손님이 돌아갈 때는 언제나 호계까지만 따라 나와 인사하고 전송했다. 결코 내를 건너는 일이 없었다. 호계를 넘으면 호랑이가 포효했다 한다.

혜원이 어느 날 유학자이자 시인인 도연명과 도사인 육수정을 전송했다. 세 사람이 서로 이야기에 몰두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호계를 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렇게 '호계삼소'가 탄생했다. 그러나 혜원이 입적할 때(416년) 육수정은 겨우 10세에 불과해서 도저히 같이 교우할 수 없고, 또한 육수정(406~477)은 461년에야 여산에 들어왔기에 이런 만남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웠기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두고두고 회자돼 온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이 일을 두고 '별동림사승(別東林寺僧)'이라는 시를 남겼다.

'동림사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곳(東林送客處)/ 달 뜨고 흰 원숭이 우네(月出白猿啼)/ 여산에서 멀리 나와 웃으며 헤어지니(笑別廬山遠)/ 어찌 호계를 지남을 성가셔 하리(何煩過虎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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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스님이 심었다는 육조송(六朝松). 동림사 경내에 있다.

동림사에는 혜원 좌상을 모신 전각인 원공당(遠公堂), 혜원이 심었다는 육조송(六朝松), 그 얼마 후에 심은 녹나무(樟木)인 호계장(虎溪樟) 등이 있다. 육조송은 나한송(羅漢松)으로도 불린다. 높이 15m. 호계장은 수령이 1천500년이 넘은 나무로 안내하고 있다. 절 입구에는 '호계교(虎溪橋)'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호계삼소도와 소식의 시 '삼소도찬(三笑圖讚)'을 새긴 비석이 있는 비각도 세워져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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