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2] 안동 소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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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3   |  발행일 2017-02-13 제29면   |  수정 2017-02-13
퇴계제자 함재와 앞 못 보는 아내의 러브스토리 깃들어
[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2] 안동 소호헌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는 보물 제475호로 지정된 소호헌이 위치해 있다. 조선 중기 별당 건물인 소호헌은 퇴계의 제자인 함재 서해가 사용한 서재였다. 소호헌 지붕 용마루 망와(望瓦)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원 안 사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소호리)에는 보물 제475호인 조선중기 별당 건물 소호헌(蘇湖軒)이 있다. 소호헌의 이름은 ‘소호’라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고려시대 정4품 벼슬을 지낸 소씨가 살았다는 뜻의 ‘소(蘇)’, 서쪽에 큰 호수가 있다는 뜻의 ‘호(湖)’가 합쳐져 생겨난 이름이다. 현재 소호헌 앞 도로가 풍광 일부를 가리고 있지만, 과거 소호헌 주변은 자연경관이 빼어났으며 시원한 전망을 자랑했다. 소호헌은 ‘丁’자형의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퇴계의 제자인 함재 서해가 서재로 사용했다. 함재는 비록 가난했지만 온화한 성품과 더불어 학식이 뛰어났기에 퇴계가 특별히 아낀 제자였다. 특히 그의 아내 이씨 부인은 시각장애인 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훌륭히 키우고 집안을 일으켜 현모양처로 존경을 받았다.

[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2] 안동 소호헌
소호헌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의 귀틀 위에 기둥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맹인 딸과 결혼한 사위에게
장인은 소호헌을 선물로 줘

남편이 요절하자 서울 이주
음식 팔아 아들 인재로 키워
선조, 이씨부인 손맛에 감탄

#1. 소호헌에 깃든 가문의 역사

원래 소호헌은 고성이씨 임청각 이명공의 다섯째 아들이자 청풍군수를 역임한 무금정 이고의 분가주택이었다. 이고의 딸은 무남독녀다. 함재는 그런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아내로 받아들인다.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단아한 인품에 이끌려 반려자로 삼았다. 함재의 인품과 인간적인 면에 끌렸던 이고는 사위인 함재에게 소호헌을 선물로 주었다.

소호헌은 여느 집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건축물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소호헌은 주춧돌 위에 바로 기둥을 올리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의 귀틀 위에 기둥을 올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용마루 망와(望瓦·처마 끝에 달린 기와)에 자리한 승천하는 두 마리 용이다. 대개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왕을 상징하는 용은 일반적으로 아무나 쉽게 쓰지 못했다. 쌍룡이 들어간 망와는 명문가를 세우고 자손만대 번성하기 위한 수호신으로 보인다.

망와에 깃든 쌍룡의 상서로움 때문인지 함재와 이씨 부인의 자손들은 명성을 떨쳤다. 함재의 아들 약봉 서성은 판중추부사로서 사후 충숙공 시호를 받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함재의 손자 서경우 또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서경우의 아들 서문중 역시 영의정을 지냈을 정도로 소호헌 주변의 사람들은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지냈다. 소호헌 동편에는 함재의 아들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다. ‘약봉태실(藥峯胎室)’이라 적힌 현판은 수백 년 전의 얘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하다.

소호헌 주변 은행나무 뒤에는 순국지사 서상부의 기적비도 있다. 서상부는 한말 의병장으로 1896년 의성 봉산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다. 일본군의 신무기에 대항해 혈전을 펼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서상부의 애국 행적에 절로 숙연해진다.

#2.소호헌의 안주인, 집안을 일으키다

소호헌의 주인이었던 함재의 생은 짧았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23세 때 병으로 요절했다. 지아비를 일찍 잃은 이씨 부인은 가산을 정리한 후 젖먹이 서성을 데리고 서울 약현(서울시 중구 중림동)으로 떠난다. 서성의 호인 ‘약봉’은 이씨 부인과 서성이 살았던 서울의 ‘약현’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됐다.

이씨 부인은 서울에서 약주와 약식, 약과를 팔아 아들의 학비를 대는 등 자식 교육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교육열이 남달라서 조선 최고의 사상가인 이율곡 아래에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현명하고 장한 어머니상(像)’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이씨 부인은 아들 서성을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서성은 알성문과 급제 후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도 인조와 강화도 피란길을 함께했다.

이씨 부인의 음식 솜씨와 관련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씨 부인이 음식을 잘 만든다는 소문은 당시 조선의 국왕인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이씨 부인의 음식맛에 감탄한 선조는 그녀가 만든 음식에 약봉가의 ‘약(藥)’자를 붙여 약과, 약식, 약주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씨 부인이 만든 음식은 오늘날 강정 등 여러가지 전통과자로 변형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씨 부인은 어진 사람이기도 했다. 지아비가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인재로 키웠으며 집안을 일으켰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약과·약식 등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널리 알리는 등 재능과 덕을 두루 갖췄다. 악조건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훌륭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후대에 길이 전해질 현모로 손색이 없다. 때때로 쉽게 좌절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볼 때 이씨 부인의 행적은 귀감으로 남는다.

글·사진=이영숙<경북 스토리 기자단> leeys99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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