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2) 윷과 성혈 연구 파고들다 연결된 선덕여왕과 첨성대…다산 기원 '祭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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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8 08:21  |  수정 2022-10-28 08:34  |  발행일 2022-10-28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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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측 공간으로 알려진 경주 첨성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난 50여 년간 윷과 성혈 연구에 배수진을 쳤던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 동구 도평동 그의 작업실 사랑채에 가면 그가 얼마나 편집증적인 인물인가를 알려주는 온갖 골동품스러운 물품이 즐비하다. 그가 30년 연구를 거쳐 자신이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모형 첨성대와 윷을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윷을 만나면서 내 삶도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윷은 단순히 어른들의 전통민속놀이가 아니었다. 한민족만의 철학이 담겨 있다. 농경사회의 역법의 축을 이룬 음력과 24절기 그리고 음양오행, 심지어 천문학의 핵심까지 스며들어 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중국의 하도·낙서, 81자의 천부경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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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면 비닐하우스 작업실에서 윷과 첨성대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숙업을 위해 목공업까지 다 접은 상태이다.
신라서 고안한 국민놀이 윷놀이
천문학의 핵심까지 스며들어가
황룡사 터 바위 새겨진 윷판과 점
생명 잉태 '삼신 사상' 성혈 접점

◆나는 윷 연구가

건구사에서 일할 때 주문이 들어오면 전국 각처를 돌아다닌다. 갈 때마다 쉬는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했다. 윷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축적하기 위해 공사장 근처 경로당과 마을회관 등을 찾았다. 그들은 우리 문화의 보고이다. 기존 민속학도 해결하지 못한 어떤 연결고리의 일부가 그들의 기억 속에 숨어 있다. 나는 그걸 찾고 싶었다. 그 마을만의 독특한 사투리, 특히 자기 마을만의 윷의 모양과 윷놀이 법칙 등을 인터뷰하고 그걸 민요 채록가처럼 면밀하게 기록해 나갔다. 매월 평균 5번 출장을 갔다. 따져보니 채록 횟수가 1천회를 넘어선다. 출장을 다녀오면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윷놀이는 각양각색이었다. 윷과 윷판의 모양이 다르고 노는 방법도 집안마다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경북 고령군의 어느 문중은 윷판 없이 놀았다.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며 말을 움직였다. 경남 통영의 어느 마을에서는 윷을 던질 때 사기 종지에 넣어 사용했다. 그들은 그걸 '종지윷'이라 했다.

윷놀이를 고안해 낸 나라가 신라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냈다. 명민한 관료들이 머리를 맞댔다. 농번기에 일할 민초가 겨울 농한기 너무 나태해져 놀기만 하면 이듬해 농사에 큰 지장을 줄 것 같아 몸도 풀고 동민끼리 화합과 공감의 시간을 갖도록 윷놀이를 정책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라만의 국민 놀이라고나 할까.

윷은 주역처럼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윷점'에서 시작되었다. 윷에는 5마리의 가축이 등장한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의미한다. 하필이면 왜 그 가축일까. 일단 십이지지 동물 중 사지가 땅에 닿고 사람이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하고, 집의 재산이 될 수 있는 놈만 골라냈다. 윷판에 오르지 못한 7마리 동물들은 5마리 가축이 윷판에서 놀고 있을 때 떡 등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나는 그 흐름을 벚나무 윷판에 새겼고 2002년 특허를 받아냈다. 2001년에는 나만의 디자인을 한 윷놀이용 말까지 특허출원을 했다.

윷은 가장 만들기 쉬울 것 같은데 정말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고난도 공법이 동원된다. 일반인이 나무를 대충 반으로 잘라 만들면 잘 구르지 않아 놀이를 할 수 없다. 보급용 길이는 25㎝. 중간 폭은 2.5㎝, 가장자리는 5㎜ 짧다. 표면은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야 된다. 그래야 던지는 사람이 잘 잡을 수 있고 던졌을 때도 기울기와 물매 차이 때문에 윷이 땅에 부딪힌 뒤 공중으로 잘 튕겨 오르게 된다. 윷을 두드리면 편경처럼 쇳소리를 내야 한다. 윷이 악기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최고는 박달나무, 두 번째는 사리나무, 이 밖에 때죽나무, 쥐똥나무 등을 사용한다.

가방끈이 유난히 짧은 나는 밤에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비롯해 신라사를 축으로 온갖 역사서를 탐독했다. 낮에 고되게 일을 하고도 쉬지 않고 바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력 덕분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800m 육상선수로 대구시항 육상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날 보고 '대구의 이소룡'이라 했다. 그만큼 완력이 남달랐다. 한때 18기 무술에도 심취해 있었다. 사범이 내게 러브콜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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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의 논리와 설명을 곁들여 특허를 출원한 신개념 윷판과 윷.
◆성혈 연구에 돌입

윷 연구의 정점에서 삼신(三神)사상의 압권이랄 수 있는 성혈 연구에 들어간다. 안동 임하댐 근처에서 바위에 윷판이 새겨진 걸 봤다. 그때 난 무릎을 쳤다. 연구욕이 더 솟구쳤다. 시간이 부족했다. 일을 접어야만 했다.

가족과 결별을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 당신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여겨라. 나는 바위를 연구하러 길을 떠나겠다."

동구 지묘동, 파계사, 경주 황룡사 호국변어정과 윷판이 새겨진 돌, 달서구 진천동, 의성군 단촌리, 임하댐 수곡리, 울산 어물동, 북구 구암동, 울산 천전리, 의성 태양동 마을 등지를 돌며 영험한 바위와 거기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신비한 홈과 구멍을 사진 촬영하고 지도로 남겨 비교 분석해나갔다. 갓바위 근처에도 성혈이 있다. 삼신당 위쪽 구멍(여자용)을 통해 물이 흐르고 중간에는 고추를 조각해 놓았다. 다산을 상징한다. 잉태한 생명에게는 첫돌이란 영광이 주어진다.

성혈은 농경사회의 최대 미덕인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 그리고 교합 장면, 출산 등을 상징한다. 여자의 상징으로 큰 사각형과 작은 사각형, 남자는 원과 사각형을 표시했다. 그것은 남녀 생식기와 입을 상징한다. 남녀의 교접, 그건 네모 안에 원을 그려 넣는 것으로 상징했다. 신은 세 범주로 나눠진다. 하늘의 칠성신은 생명, 산신은 물을 전달하고, 용신은 물을 관장한다. 육해공 모든 영역의 영험을 위한 치성 의식이 지금까지 봉헌되고 있다.

아들이 결혼하면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자기 자식을 '아범'이라 한다. 아범은 '정자(아이)를 품은 범'이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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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관광상품으로 제작한 첨성대 모형.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 첨성대
별 우러러보기에는 불편한 구조
농업神 섬긴 영성 숭배 제단 추측
성골 출신 여왕의 후사 위한 聖物
10분의 1 축약 모형 2년만에 완성

◆마침내 첨성대를 연구하다

내가 성혈에서 첨성대 연구로 가게 만든 결정적 발견이 있다. 바로 경주 황룡사 절터 바위에 새겨진 윷판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윷판 네 구역 복판에 점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이게 뭘까? 연구를 거듭하면서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윷판은 여성을 의미하고 그 네 점은 남자의 사지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남자의 사지가 바닥에 닿는 순간, 그게 언제이겠는가. 생명 잉태를 위한 교접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 네 점이 첨성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형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 등 선덕여왕 대에 세워진 건축물이 모두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 첨성대. '별을 우러러보는 곳'이란 의미인데 너무 불편한 구조다. 평지이고 내부 구조상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상당히 불편한 구조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의 구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일종의 불교적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동양사학자 이용범이 처음 제기했고, 최근에 고대사학자 김기홍에 의해 좀 더 변형된 형태로 전개됐고 소설가 최홍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 설들은 첨성대의 외형이 불교에 등장하는 수미산(須彌山)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과학사학자 박성래는 이용범의 의견을 받아들여 '외형적인 모습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나, 실제로는 우리 조상들이 농업 신으로 섬기던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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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정자석 위에 선덕여왕 후사의 염원을 담은 비밀의 정자랄 수 있는 백구정을 제작해 올려놓았다. 그 사이에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하는 박 소장.
첨성대를 알려면 우선 선덕여왕을 알아야 된다. 신라는 내내 성골(聖骨)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26대 진평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성골 남자가 없자 화백회의에서 성골 여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15년간 세 명의 남편(김용춘·흠반·을제)을 거느렸지만 후사가 전혀 없었다. 신라 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에게는 삼서제(三壻制)가 시행됐다고 한다. '서(壻)'는 남편을 뜻하므로, 세 사람의 남편을 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 선덕여왕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삼서제는 여왕에게 씨를 제공하는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후사가 없는 선덕여왕.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때 선덕여왕을 짝사랑했고 그래서 분황사를 지은 지귀 그리고 설총, 세 명의 남편이 의기투합했다. 극비리에 신라의 명운을 건 첨성대를 짓는다. 이건 그럴듯한 공공건축물이라 할 수 없었다. 오직 선덕여왕의 후사를 위한 음지에 가려진 성물(聖物)이었다고나 할까.

첨성대 상층부에 돌출한 12개 바위는 세 명의 남편이란 사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정사각형 구멍은 생명을 잉태하는 삼신 구멍, 그걸 둘러싼 삼층석은 칠성·산신·용신바위다. 멀리서 보라. 전체적으로 첨성대는 왕관과 왕복을 입고 있는 여왕의 자태와 흡사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맨 꼭대기 정자석 위에는 백구정(白鷗亭)이 왕관처럼 올려져 있었다. 명칭도 첨성대가 아니라 '점성대(占星臺)'였다. 별 '성' 자는 별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자궁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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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벽에 걸린 윷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박 소장.
백구정의 실체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경주 순창 설씨 가문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세헌편(世獻篇)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첨성대에 있는 백구정에서 자주 노닐었다. 상층에 대의 이름 3자가 크게 남아 있으니.' 결국 그 현판의 글씨는 설총이 적은 것이다.

확신이 섰다. 나는 새로운 첨성대 인문학을 위해 첨성대의 원형을 만들고 싶었다. 10년 전부터는 나무 벽돌 하나하나의 크기와 굽이 각도를 달리하면서 10분 1 축약된 박진수 버전의 첨성대 모형 한 개를 무려 2년에 걸쳐 완성했다. 물론 백구정까지 만들어 올려놓았다. 뒤이어 만든 것까지 2개(용암산의 빛이여·바람아 불어다오)를 특허출원을 했다. 조만간 내 자전소설도 출간할 것이다. 나는 출산율 급감의 대한민국 앞에 다산의 상징인 첨성물 모형과 한민족의 영험함이 깃든 윷을 내민다. 그걸 위해 내 청춘과 신명을 다 바쳤다. 그것에 대한 답을 이제 당신이 할 차례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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