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매혹의 ‘러브 어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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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05   |  발행일 2014-04-05 제23면   |  수정 2014-04-05
20140405

직장에 대한 미련
훌훌 떨쳐버린 뒤
로맨스 소설들 읽어
다양한 사랑을 보면서
다양한 인생들을 만나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던 몇 해 전 4월, 나는 가족과 집을 떠났다. 18년간 몸담았던 그 직장에 대한 미련은 훌훌 벗어던졌다. 모든 인연과 맺어진 끈은 가슴속에 단단히 파묻은 채 길을 나선 것이다. 이삿짐은 간소했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고교 시절 이후 한 번도 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셔놓았던 로맨스 소설 50여 권이 전부였다.

내가 도착한 ‘하늘 아래 첫 동네’는 인기척이 뚝 끊겨 있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그날 이후 3년 동안 나는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이 펼치는 어색한 구애와 낭만적 사랑의 순간들, 슬픈 이별의 파노라마를 지켜보며 웃고 흥분하고 안타까워했다.

러브 어페어(Love Affair)의 캐릭터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에서, 소설가로, 시인으로, 화가로, 음악가로, 사상가로, 심지어 성직자(수도자)로 바통이 넘겨졌다. 그들의 사랑 방정식은 예술의 여러 형식처럼 확연히 달랐고, 시대와 공간도 확장되었다. 중세의 연애담은 고딕성당처럼 무겁고 웅장했으며, 현대의 사랑은 자유롭고 현란하게 느껴졌다. 내가 판독한 그들의 에로티시즘은 경이로운 시편(詩篇)이자 신비스러운 그림이었고 절망적인 퍼포먼스였다.

신부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금기를 위반했지만 성스러운 꽃으로 피어났다. 칠순을 넘긴 노인 괴테와 십대 소녀 울리케와의 사랑은 조금 꼴사나웠지만 솔직하고 너그러웠다. 신하 보스웰과의 사랑 때문에 단두대에 목을 내놓았던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로맨스는 대단히 부주의하고 위험했다. 스페인의 요부 카르멘의 연애 행각은 교활하고 자극적이었으며, 프라하의 외톨이 카프카의 사랑은 어둡고 쓸쓸한 풍경화였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남장의 여인 조르주 상드의 연정은 아련한 엇박자 연주로 끝났고, 오만한 로댕을 미치도록 사랑한 카미유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40년간 증오의 조각상을 새기며 무덤으로 걸어갔다. 20세기 최고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사랑은 음탕하고 소란스러웠으며, ‘러시아의 장미’ 갈라를 사랑한 살바토르 달리는 화폭 위에서 초현실적인 마술을 부렸다.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한 시몬 보부아르는 미국의 작가 앨그렌과 17년에 걸쳐 사랑과 그리움의 줄다리기를 했으며,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콜레라시대의 사랑’에서 청춘의 로맨스에 주술을 걸고 노년의 가물거리는 로맨스를 해피엔드로 둔갑시켰다. 사랑의 실패자 스탕달은 쥘리앙의 불가능한 애정을 권총으로 끝장냈고, 크루아세의 은둔자 플로베르는 권태와 허영을 사랑으로 바꿔보려는 엠마 보바리를 비소로 죽였으며, 사랑의 파괴자 톨스토이는 안나카레리나의 정숙하지 못한 사랑을 철길 위에서 싹둑 잘랐다.

영원한 과대망상가 발자크의 사랑은 허풍과 뻔뻔스러운 무례함이 배어있었고, D. H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육감적이었지만 싱싱했다. 방랑시인 릴케와 화가 리사르트와의 짧은 사랑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작가 존 파울즈는 사랑의 삼각관계를 힘겹게 헤쳐 나왔고, 시인 원제를 사랑한 중국의 여류소설가 다이 허우링은 세상의 몰이해에 사납게 분노했다. 우즈강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와 열 살 연하의 비타 섹빌 웨스트와의 동성연애는 은밀하고 도발적이었다. 애인의 배신에 낙담하고 남편의 죽음 앞에서 화해하는 서머싯 몸의 여인 키티의 사랑은 ‘인생의 베일’처럼 낯선 무늬로 어른거렸다.

다시 4월의 꽃들이 만개하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니 로맨스의 잔칫상은 여전히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운명은 굶주림에 허덕이다 포식에 불안해하고, 불경스럽게 아우성치다가 장엄하게 퇴장하는 한 편의 비극처럼 막을 내렸다. 불멸의 유혹을 남긴 채!
전종건 수성문화재단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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