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음서제와 세습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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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3-25   |  발행일 2015-03-25 제31면   |  수정 2015-03-25
[자유성] 음서제와 세습

신분세습 또는 권력세습이 화두로 나오면 흔히 음서제(蔭敍制)가 거론된다. 음서제는 고려시대·조선시대 때 공신과 고위관료의 자식이나 친척을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다. 신라시대에도 공신의 자제를 관직에 등용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제도화된 건 고려 성종 때부터다. 고려시대엔 왕족과 공신, 3품 이상 고관의 경우 자손(子孫)은 물론, 수양아들·사위·조카·아우까지 음서제 혜택을 받았다. ‘1년 1인 채용’이라는 원칙이 있었음에도 수적으로 음서제 출신이 과거급제자를 압도했다. 음서제 출신자는 관직 진출 이후에도 조부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했고, 많은 이들이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유럽에서는 귀족 작위를 세습할망정 장자에 국한되고 관직 대물림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음서제와 대비된다.

근대화 이후 세습정치가 고착화된 나라는 필리핀이다. 미국의 통치를 받던 1898년을 전후해 필리핀에는 가문정치가 착근하기 시작했고, 100년 넘게 30여개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했다. 그 중에서도 아키노 가문과 마르코스 가문이 특히 도드라진다.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이노이 아키노 3세는 현직 대통령이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는 상원의원이다. 하지만 뭐니 해도 권력세습의 압권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로 이어지는 북한의 현대판 왕조체제가 아닌가 싶다.

고려·조선시대의 음서제 같은 음습한 제도는 사라졌지만, 모든 게 투명해진 지식정보사회에서도 세습에 따른 그늘과 양지는 여전하다. 대기업 노조의 일자리 세습도 그 일단(一端)이다. 고용노동부와 노동연구원의 조사 결과, 직원 300명 이상인 대기업 600개사 중 180여곳에서 노사가 단체협약을 통해 직원 가족에게 채용 특혜를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부모가 비정규직일 경우 그들의 자녀 78%가 비정규직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청년실업이 최악인 가운데, 부모 잘 만나는 게 최고의 스펙이라는 젊은이들의 뼈 있는 자조(自嘲)가 공명을 울린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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