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3] 호미곶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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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4   |  발행일 2017-02-14 제29면   |  수정 2017-02-14
조선침탈 야욕 日 강요로 건립…굴곡의 근현대사 100년 비추다
20170214
①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호미곶등대. 1908년 12월20일 점등한 이후 100년 넘도록 영일만 주변 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고 있다. ② 호미곶등대 인근 국립등대박물관에 전시된 호미곶등대 모형. 6층으로 된 등대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③ 1907년 호미곶 앞바다에서 좌초한 쾌응환호 좌초 사건을 기리는 ‘쾌응환 조난 기념비’가 남아있다. ④ 국립등대박물관에 전시된 등대등. 박물관에서는 등대와 관련한 각종 전시물을 볼 수 있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영일만 동쪽 끝자락에 호미곶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등대는 장쾌한 동해를 마주하고 우뚝 서 있다. 등대의 외관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다. 순백색의 등대는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날렵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높이만 26.4m에 달한다. 밤에 등대를 바라보면 마치 양초에 촛불이 켜져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마저 든다.

#1. 대한제국의 상징을 품은 등대

호미곶등대는 건립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호미곶등대는 1908년 4월11일 착공했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했다. 오직 벽돌만으로 이뤄진 팔각형의 등대로 그해 11월19일 준공됐다. 호미곶등대는 1908년 12월20일 점등한 이후, 현재 ‘호미곶 항로표지 관리소’로 운영되며 영일만과 그 주변을 지나는 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고 있다.


日 실습선 호미곶 앞바다 좌초
4명 희생…항만부실 책임 물어
1908년 4월 착공, 11월에 준공
내부 6층…조선왕조 흔적 남아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 왼팔
호미곶 바다에 버려졌다는 설도



그동안 등대의 이름도 몇 번 바뀌었다. 호미곶등대가 건립될 당시의 이름은 동외곶등대였다. 이후 장기갑등대, 장기곶등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2년 호미곶등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등대의 이름이 이처럼 자주 바뀌는 것은 여전히 등대가 해상교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호미곶등대는 내부를 개방하지 않아 일반인은 내부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호미곶등대에는 조선왕조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다. 등대 내부는 6층으로 돼 있는데, 각 층의 천장에는 당시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李花文)이 새겨져 있다. 호미곶등대 인근 국립등대박물관 내 등대전시관에서 호미곶등대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2. 근대사의 격랑을 겪다

호미곶등대의 역사는 근대사 격랑 속에서 시작됐다. 호미곶등대 건립은 조선을 침탈하려는 일제의 야욕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896년, 청일전쟁 이후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준비한다.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던 1907년 9월9일, 일본의 도쿄수산강습소(도쿄수산대 전신) 실습선(快鷹丸, 가이요마루)이 호미곶 앞바다를 항해하다 암초에 부딪혀 사상자가 나온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쾌응환 사건’이다. 조난 당시 주민들의 구조활동에도 불구하고 교수 1명과 학생 3명이 희생됐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항만시설이 부실해 참사가 벌어졌다며 쾌응환 사건을 조선의 책임으로 묻는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 전승국으로 기세등등한 일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호미곶등대는 일본 정부의 강압적인 요청에 따라 조선의 국비로 지어졌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구만리에는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한 ‘쾌응환(快鷹丸) 조난 기념비’가 남아있다. 조난기념비는 광복 이후 비석이 훼손되고 뽑히는 등의 풍파를 겪었으나, 한일 관계 개선에 따라 현재는 그 주변이 정비돼 유족을 비롯한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사건은 포항의 동화작가 김일광의 ‘조선의 마지막 군마’에도 등장한다.

호미곶에는 조선 말기 개화파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관련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당하는데,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버려졌다. 당시 김옥균의 왼팔이 호미곶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미곶은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관련된 장소인 것이다.

굴곡의 역사를 뒤로한 호미곶등대 주변은 유명 관광지로 거듭난 상태다. 등대 주변에는 해맞이 명소인 호미곶해맞이광장이 조성돼 있으며, 새천년기념관 등이 있어 동해안 관광 필수코스로 꼽히고 있다. 호미곶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 주변은 늘 인파로 북적인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거나 인근 카페에서 구룡포에서 수확한 밀로 만든 빵을 먹으며 추억을 만들고 있다.

글·사진=마승희<경북 스토리 기자단> 0330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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