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빈곤하지 않은 이들을 변호하는 국선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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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5   |  발행일 2017-11-15 제34면   |  수정 2017-11-15
부자의 국선변호인제 이용
형사재판의 불균형 구조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경제적 약자 위해 작동하게
충분히 고민하고 개선해야
[수요칼럼] 빈곤하지 않은 이들을 변호하는 국선변호인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변호인단이 일괄 사임한 전직 대통령에게 법원이 역대 최대 규모의 국선변호인을 선정해 주었다는 뉴스에 ‘왜 내 세금으로 변호사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댓글에 가득하다. 이 일을 계기로 국선변호인이 돈 없는 서민만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다소 불편한 진실을 일반인도 알게 된 것 같다. 국선변호인 제도는 변호인을 선임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위하여 도입되었지만,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제도를 도입한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도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면서 나보다 훨씬 경제적 형편이 좋은 피고인을 여럿 만났다.

그중 최고의 재력가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 번듯한 건물을 가진, 요샛말로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 월급의 몇 배가 통장에 꽂히는 할아버지였는데, 사소한 공무집행방해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국선변호인 선정 청구를 하여 내가 선정되었다. 내 사무실에서 사건에 대해 상담을 충분히 했는데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핑계를 대며 “밥을 같이 먹자” “커피를 사겠다” “돈은 내가 낼 테니 직원들 회식 날을 잡아라” 등의 제안으로 몇 달 동안 나를 귀찮게 했다. 내가 전혀 응하지 않으니 어느 날은 사무실에 봉투를 들고 와 내 책상에 던지다시피 하곤 가버렸다. 어떻게 돌려주나 고민하다 주소로 돈을 보내는 우편환 제도를 알게 되어 우체국에 가서 돈을 보냈는데, 그때 봉투를 열어 보았더니 웬만한 사선변호인 수임료에 맞먹는 정도의 돈이었다. 국선변호인 앞에서 돈 자랑을 하고 싶었을까. 사선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강남 건물주’ 같은 사건은 예외적으로 매우 부유한 피고인의 사건이지만, 부유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결코 빈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건은 일상적으로 많다. 그 상당수는 약식명령 정식재판청구사건에서다. 벌금형의 약식명령을 받고 정식재판 청구를 하면 원래 정식재판이 열리는 경우와 똑같은 절차로 재판이 진행되는데 다만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이라는 게 있어서 법원은 약식명령의 벌금형보다 높은 형을 선고할 수 없다. 벌금형이 대개는 몇 백만 원 수준인데, 사선변호사를 선임하면 변호사 비용이 몇 백만 원 드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생각해서 사선변호인을 선임하지 않고 국선변호인 선정 청구를 하는 거다. 형(刑)의 상한은 정해져 있지, 변호사 비용은 자기가 부담하는 게 아니지, 그러니 증거에 비추어보면 유죄 판결이 거의 확실한데도 별의별 증거방법을 다 동원해 재판을 지연시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권리 의식이 강해서 “내 세금으로 국선변호 비용 받는 거 아니냐”며 국선변호인에게 요구하는 게 많고 고마워하는 마음은 거의 없다. 그런 사건을 맡으면 보람이라곤 없어 힘이 빠지곤 한다.

종종 그런 질문을 받는다. 국선변호인이 왜 그런 사람까지 변호하느냐고. 국선변호인은 법원에서 선정해 준 사건을 맡는 사람이지 선정절차에 관여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그 질문에 대해 내가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 본다. 민사재판에서도 국가가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는 소송구조(訴訟救助)라는 제도가 있는데, 그 제도의 혜택을 보려면 경제적 형편의 어려움을 소명해야 한다. 하지만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이 국선변호인 선정 청구를 하면 웬만하면 경제적 형편을 묻지 않고 변호인을 선정해 준다. 민사재판은 대등한 당사자들의 대결이어서 재판을 당사자들 각자의 책임으로 하지만, 형사재판은 개인(피고인)이 국가(검사)와 대결하는 구조이므로 그 불균형을 국가 스스로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선변호인 제도가 경제적 약자를 위해 제대로 작동하도록 개선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형사소송법은 반드시 변호인이 있어야 하는 사건 외의 사건에 대해 ‘법원은 피고인이 빈곤 그 밖의 사유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에 피고인의 청구가 있는 때에는 변호인을 선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빈곤 그 밖의 사유’를 실질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이번 기회에 충분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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