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지베르니(Giverny)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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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1   |  발행일 2017-12-01 제37면   |  수정 2018-06-15
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名作 속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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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정원. 넝쿨 식물을 올려 꽃 터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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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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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집 거실에서 내다본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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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연못 입구. 대나무로 가려져 있어 연못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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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집.

프랑스 파리는 화려하고 어수선하며 세련되고 너저분하다. 대도시의 온갖 매력이 총합된 파리는 그래서 여행객들을 설레게도 하고 지치게도 한다. 그럴 때 꼭 한번 찾아가보면 좋은 쉼표 같은 마을이 지베르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70㎞ 떨어져 있는 지베르니는 센 강변의 작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유명한 마을이다. 이처럼 사람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인상파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베르니는 모네가 죽을 때까지 인생 후반을 보냈던 곳이어서 미술 애호가 사이에서는 성지로 여겨진다. 특히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을 들렀거나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연작을 접한 사람들은 작품과 오브제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파리서 서쪽 70㎞ 센 강변 한적한 마을
풍경에 사로잡힌 모네가 43세 때 이사
86세로 세상 떠날 때까지 반평생 살던 곳

걸음마다 꽃향 풀썩이며 닿은 모네의 집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 자부
‘지베르니의 정원’ 등 배경인 집앞 꽃밭
19폭 ‘수련’ 배경이 된 도로 건너 연못
‘정원사’로 불리기를 좋아한 그의 솜씨


내가 이 마을 찾은 것은 58일 일정의 유럽자동차여행 기간 중에 거의 50일차쯤 되는 10월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광장과 성당과 역사적 건축물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유럽의 도시들에서 여행기간과 비례해 감흥이 옅어져가고 육체적 피로도도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모네의 집(Maison de Claude Monet)’ 외에는 볼거리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그곳으로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광안내소가 15세기의 하프 팀버 건물이고, 11세기에 지어진 노트르담 교회에 루이 13세 시대의 오르간이 있다거나 지베르니 인상파 미술관 등을 방문해도 좋다는 이 도시의 소개는 오히려 정말 모네의 집만 보면 되겠다는 안도감마저 들게 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너무 폼이 나지 않는다. 문자나 언어의 다리를 거치지 않고는 감흥을 느끼기 힘든 ‘이야기’ 중심의 중세 그림보다는 직관적인 인상파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자. 또 지난해 서울에서 열렸던 컨버전스 아트 ‘모네, 빛을 그리다’전을 관람한 30여만 명에 속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하자.

이유가 무엇이든 지베르니는 긴 여행 중에 은연중 생긴 ‘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했다. 나의 여행 스타일로 보자면 이곳은 반나절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느려지기로 작정하고 아예 하루 전에 이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해 질 무렵 도착한 작은 목조 호텔은 철길과 강을 사이에 둔 한적한 도로변에 있었다. 객실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은 소박하지만 정갈했다. 체크인을 하고 마을 산책이라도 나갈까 하다가 일찌감치 레스토랑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막 불을 밝힌 테이블 위 촛불의 흔들림은 창밖의 풍경들을 이리저리 바꿔놓았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에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 가끔씩 반짝였다 사라지는 자동차 불빛, 잊을 만하면 느릿느릿 들리는 기차 소리를 즐기며 모처럼 생각 없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새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 시골집에서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도 한적했다. 천천히 마을길을 돌아 관광안내소 앞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오전 9시가 갓 지난 주차장에는 두세 대의 차만이 주차돼 있었다. 주차장에서 모네의 집까지 이어진 길지 않은 거리도 눈을 둘 곳이 많았다. 시선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지그재그로 옮기는 발걸음마다 꽃향기도 풀썩인다. 파리에서 태어난 모네는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돈을 벌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짓겠노라 결심을 했다고 한다. 가난한 예술가를 사로잡은 풍경이 이런 편안함은 아니었을까? 내가 느꼈던 강박을 모네 역시 파리 생활에서 느꼈을 법하다.

모네는 더 견디지 못하고 돈을 마련하기도 전에 무작정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땅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우선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나이 43세 되던 1883년이었고, 이후 1926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43년간, 정확히 그의 반평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서 자신이 열망하던 농가주택을 구입했다. 모네의 집 입구는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고 소박했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도 많지 않아서 마치 친구 집에 초대된 듯 편안하고 한가로웠다. ‘모네의 집’에는 아틀리에와 가족이 살던 방, 부엌, 거실 등이 개방돼 있다. 집 안에는 가구와 실내 장식, 액자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부엌과 식당은 각각 파란색과 노란색의 통일된 색조로 꾸며서 깔끔함과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벽 곳곳에 걸린 일본화 액자는 당시 그가 동양문화에 매우 경도돼 있었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분 동양문화에 심취해 직접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모네는 특히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네의 집의 진정한 매력과 볼거리는 두 곳으로 나뉜 정원이다.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두 가지는 그림 그리는 일과 정원 일”이라고 한 모네는 ‘정원사’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모네가 처음 정원에 관심을 보인 것은 풀과 나무, 그리고 풍경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아틀리에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직접 빛을 마주하며 작업을 했다. 얼마 전 고흐의 유화 ‘올리브 트리’에서 128년 만에 물감 속에 뭉쳐진 메뚜기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이 역시 자연의 풍경을 직접 마주하고 작업했다는 물증이라고 할 것이다.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토로한 모네가 다른 인상파 화가들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그 빛을 잡기 위해 생각해낸 공간이 정원이었다. 집 앞의 정원에서라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 빛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집 앞의 첫 정원은 꽃밭으로, 모네의 명작 ‘지베르니의 정원’ ‘지베르니 정원의 사잇길’ 등의 배경이 된 곳이고, 도로 건너편의 정원은 연못으로 그의 대표작인 19폭짜리 대형 그림 ‘수련’의 배경이 된 곳이다. 정원으로 나서 보니 모네가 빛을 들이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10월인데도 계절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꽃들이 만발해 있다.

밖에서 그림 작업을 한 모네는 계절에 따른 빛과 자연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다. 봄에 피는 꽃과 여름에 피는 꽃이 다르고, 또 낙엽 지는 가을에 더욱 빛나는 꽃들이 있다는 것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절마다 피는 꽃을 철저히 디자인했고, 그 결과 이런 10월에도 꽃이 만발한 정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봄에 피는 식물 옆에 여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심고, 그 뒤편에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심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다 같은 종이라도 심는 시기를 달리함으로써 꽃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고, 심지어 하루 동안의 빛의 변화를 계산해 아침에 피는 꽃, 점심 햇살이나 저녁노을에 어울리는 꽃들을 구분해 식재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접목’의 기법까지 동원해 새로운 종을 개발하기도 했으니, 과연 정원사를 넘어 식물학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그는 꽃 색의 농담이나 명암, 꽃의 크기나 줄기의 길이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해 정원을 꾸몄던 것이다.

지하보도로 길을 건너면 또 다른 모네의 연못이 등장한다. 입구에 촘촘히 대나무를 심어 정원 안쪽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모양새가 익숙한 동양 정원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낯설지 않다. 마을을 흐르는 강의 물길을 틀어 이곳 연못으로 유입시킨 뒤 다시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자연을 정원으로 끌어들이는 우리의 전통 정원 디자인과 닮았다. 물길 위에 세운 두 개의 초록색 다리는 아치형으로 서로 마주 보게 놓아서 주변의 나무나 식물들과 조화되도록 만들었다. 연못 주변에 둘러선 버드나무와 등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사이사이에 철쭉이나 작약, 갈대 등이 어우러져 길 너머 정원과는 또 다른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등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연작은 동일 오브제의 빛의 변화에 따른 미학적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 방식이다. 이 연못을 대상으로 한 ‘수련’은 그의 연작 작업의 정점이며, 그가 빛을 대하는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35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 가운데 200여 점이 이 연못의 수련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을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폴 세잔의 평가는 작품과 오브제, 즉 ‘수련’과 이 연못을 함께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다.” 모네 스스로가 한 말이다. 그래서 이곳 모네의 정원을 거니는 것은 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 속을 거니는 것이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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