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의 사필귀정] 폭로와 처벌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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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8   |  발행일 2018-03-28 제30면   |  수정 2018-03-28
20180328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누군가의 범죄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피해자가 기대하는 수준의 처벌이 선뜻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 사례가 대표적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사실 관계를 부인하거나 마지못해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시늉만으로 그치기도 한다. 위세와 명망을 가진 인사 중에는 의도치 않았지만 잘못이 있었다면 사과하겠다,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참회의 시간을 갖겠다고 하면서도 막상 피해자를 대면해 아픔을 공감하고 피해의 회복과 함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드물다.

최근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듯 피해자가 힘들게 결심해 사건을 공개하더라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느리고 신중하게 진행된다. 유력 정치인이나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가해자가 아니면 언제쯤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기는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현행 법률은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의 권리에 대해 명시적으로 규정해 폭넓게 보장하는 데 반해 피해자의 권리는 제한적으로 보장하거나 선언적으로 규정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열 명의 범죄자를 풀어주어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의 정신이다.

범죄의 증거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관련 진술이 서로 일치하는 사건이라면 범죄 행위를 입증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일이 비교적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거나 관련 진술이 상반되고 일관성이 없어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성폭력은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두 사람만 아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많은 데다, 사건 발생 직후 대부분 사건에서 피해자는 처벌을 위해 필요한 즉각적인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가해자의 범죄 행위를 입증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법률은 강간에 대해 ‘폭행과 협박’을 요건으로 엄격하게 규정하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처벌을 요구한 사건은 그 처리 결과에 따라서는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는 등 법률과 제도가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공소시효도 문제가 되곤 한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충분하지 않아 2차 피해로 이어지는 일도 다반사여서 성폭력을 당하고도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가 부지기수다.

범죄 사실을 입증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온전히 국가의 책무다. 피해자가 실명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하면서 처벌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명백하게 입증하여 엄정히 처벌하는 일은 경찰과 검찰이 마땅히 담당할 일이다. 미투를 계기로 피해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요구하는 법률과 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무죄추정을 받는 피의자 권리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피해자를 더 많이 고려하는 방향으로 개선 방안이 검토되어야 한다. 활발한 사회적 공론을 통해 폭로와 처벌 간에 상존해온 간극을 줄이기 위한 법률과 제도의 합리적 개선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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