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스티그 비요크만 감독·2015·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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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4   |  발행일 2018-09-14 제42면   |  수정 2018-09-14
잉그리드 버그만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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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랜드’는 고전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했다.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의 첫 데이트 장소는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뒷날,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둘이 마주치는 것은 영화 ‘카사블랑카’를 닮았다. 탭댄스를 추며 두 주인공이 노래하는 장면은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밴드 웨곤’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 지망생인 미아의 방에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었다.

역대 할리우드 여배우의 순위를 꼽는다면 상위권에 반드시 들어갈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스웨덴 영화계에서 활약하던 그녀가 할리우드 제작자의 눈에 띄어 미국으로 진출했을 때의 나이는 스물넷, 스웨덴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은 직후였다. 할리우드로 건너와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는 세기의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이라는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감독의 영화 두 편을 본 그녀는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다. 결국 영화를 찍으며 사랑에 빠진 그녀는 임신을 해서 미국의 보수층을 발칵 뒤집히게 한다. 둘 다 가정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지만 할리우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로셀리니 감독과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낳은 그녀는 뒷날 결국 파경을 맞게 된다. 할리우드로 복귀하여 ‘아나스타샤’로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그래서 그녀는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가 되었다. 단 한 번의 인생에서”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내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은 다큐멘터리다. 배우가 된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의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쓴 일기와 편지를 비롯해서 홈비디오로 촬영하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찍은 영상들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일기와 편지를 따라가다 보면, 청초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모습 어디에 그렇게 열정적이고 거침없는 면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58세에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몇 년 뒤,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부름을 받는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녀의 삶을 꼭 닮은 영화 ‘가을 소나타’를 찍는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한 샬롯은 나이 든 피아니스트다. 그녀는 예술을 위해 가정을 버린 사람이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첫 번째 남편과 딸을 떠난 것을 연상시킨다. 7년 만에 만난 딸 에바는 엄마에게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분노를 퍼붓고, 샬롯은 어쩔 줄 모른다. 자신의 인생과 딸을 제대로 껴안지 못한 샬롯은 다시 한 번 황망하게 떠나버린다. 결국 그런 엄마를 다시 품는 것은 딸 에바다. 딸은 엄마를 향한 화해의 편지를 쓴다.

‘가을 소나타’라는 영화가 없었다면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캔들 많은, 화려한 옛 스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 앞에 정직하게 마주 섰다. 배우로서, 여인으로서, 무엇보다 엄마로서의 자신을 거울 앞에 세웠다. 엄마의 품이 그리워 몸부림쳤다는 딸의 고백을 듣노라면, 감독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어땠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고해성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한 일보다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한다”고 말한 잉그리드 버그만. 이제 성인이 된 딸은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그토록 엄마를 그리워했는데, 엄마는 후회가 없다니….” 배우가 된 또 다른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말한다. “엄마는 우리도 그렇게 인생과 일을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 것 같아요.” 그녀는 배우로서, 여인으로서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사랑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에게서 연기를 빼앗는다면 숨을 빼앗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잉그리드 버그만. 마지막까지 배우이기를 원했던 그녀를, 세상은 가장 아름다운 배우의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제68회 칸 영화제의 포스터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지 꼭 백년이 되는 해였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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