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프랑스 이야기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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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5   |  발행일 2019-11-25 제30면   |  수정 2020-09-08
스트라스부르 장학회의 후
파티장에서 박애정신 느껴
고층없는 파리 우리와 대조
인간적 도시로 새삼 깨달아
기분 나쁜 선입관이 말끔히
20191125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제학자

이번 여름 프랑스를 다녀왔다. 나는 아주 오래 전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본 프랑스의 인상은 도무지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다. 대개 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곧잘 하는데, 유독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안 하는 것을 자존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으로 그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럽 장학위원회 총회가 열려 10개국이 참가했는데, 한국은 유일하게 비유럽 국가이면서도 초청을 받아 우리 한국장학재단에서 3명이 참석했다. 스트라스부르란 곳은 처음 가보았는데, 독일과의 접경에 위치하는 알자스 로렌 지방의 중심지로 과거 프랑스, 독일 사이 분쟁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도시의 국적도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한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이 생각나는 도시다. 유럽 의회가 바로 이 도시에 있는데, 말하자면 유럽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회의는 유럽 각국의 장학재단 책임자들이 2년에 한번씩 만나 대학 관련 토론을 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회의였는데, 나흘간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다. 회의를 마치는 날 열린 송별연에서 나는 특별한 장면을 목격했다. 파티는 오후 8시에 시작해서 2시간 동안 식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좌석에 앉아서 파티를 하지만 서양은 앉기 전에 서서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의 장점은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스트라스부르 시장, 그리고 대통령과 장관을 배출하는 유명한 그랑제콜 총장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뒤 실내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한 것이 밤 10시였고, 끝없는 식사와 대화, 그리고 초청가수의 노래 등이 이어졌다. 자정이 되어 파티가 거의 파장 분위기가 되었을 때 주최측이 갑자기 종을 땡땡 치더니 식당에서 수고한 요리사, 음식 나르는 사람 10여명을 앞으로 불러내어 참석자에게 소개했고, 사람들이 큰 박수로 감사를 표시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게 바로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로구나 하고 느꼈다. 혁명 200년이 지났지만 그 정신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날 프랑스 장학재단 파리지부장의 초청을 받고 파리지부를 방문했다. 지부장은 친절하게도 우리 일행을 건물 옥상에 안내하여 파리 전경을 구경시켜 주었다. 멀리 에펠탑과 책을 펼친 모양의 국립도서관, 그리고 새로 생긴 시커먼 대형 상업건물 하나 말고는 모든 파리 건물이 발밑에 보이는 게 아닌가. 하도 신기해서 파리지부장에게 이 건물이 몇 층이길래 파리 시내가 전부 발아래 보이느냐고 물어보니 9층 건물이라고 한다. 아니, 대구에 있는 한국장학재단 건물도 9층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둘러보니 파리의 대부분 건물은 5층이고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는 아예 없다. 아, 이런 게 바로 유럽식, 인간적 도시로구나 하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우리나라 도시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부동산투기의 도가니인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걸로 뉴스가 나와 온 국민을 놀라게 한 왕년의 명배우 윤정희가 수십년 전 한국을 방문하여 TV 대담에 출연한 것을 우연히 시청한 적이 있다. 그때 윤정희는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인은 매우 검소한데 한국인은 사치가 심하다. 프랑스인은 자녀를 엄하게 키우는데 한국인은 애들 하자는 대로 다 해준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시사회에서 만나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시사회에 참석했던 배우 신성일은 작년 타계했고, 윤정희는 투병중이라 하니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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