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기억해, 한국군이 우릴 구덩이에 몰아넣고…’ 슬픈 자장가 전해져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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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8   |  발행일 2014-08-08 제34면   |  수정 2014-08-08
●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 마을 한국군증오비
‘아가야 기억해, 한국군이 우릴 구덩이에 몰아넣고…’ 슬픈 자장가 전해져와
푸옌성 붕따우 마을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을 묵묵히 듣고 있는 베트남 어린이들.
‘아가야 기억해, 한국군이 우릴 구덩이에 몰아넣고…’ 슬픈 자장가 전해져와
평화기행단은 빈호아사 초등학교 어린이 40명(학살자 유가족)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전교생 400명에게 옷과 학용품을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한 어린이가 어머니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활짝 웃고 있다.

꽝아이성은 ‘선미(SON MY)학살’ 또는 ‘밀라이학살’이 자행된 지역이다. 1968년 미군은 꽝아이성 선미 마을에서 민간인 504명을 학살했다. 이는 베트남에서 벌어진 최대의 집단학살이다. 인근 빈선현(縣) 빈호아사(社·사는 한국의 읍·면 단위)에서도 한국군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학살(430명)이 있었다. 이 사실은 99년 한국의 한 일간지에 구수정 박사의 글이 실리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빈호아사에 포함된 5개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 현황은 현재 빈호아사촌 들머리에 있는 한국군증오비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이 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최초로 밝힌 사람은 80년대의 한 영국인 작가다. 그는 꽝똥전투 답사차 이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3년간 주민의 증언을 채록해 학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엔 422명이었으나 베트남정부의 추가조사로 8명이 더 포함됐다. 영국 작가는 모국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사비를 포함해 기금을 모아 빈호아사 들머리에 위령비를 세웠다. 독일인들은 수차례 이곳을 찾아 마을주민에게 의수와 의족을 달아줬다. 90년대 초 일본의 평화운동가인 ‘요코’라는 여성이 이곳에 들러 주민을 돕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가족이 이를 알려 일본정부의 자금으로 99년 빈호아사에 초등학교를 건립했다.

구 박사가 이 마을을 찾은 때는 98년이다. 그는 5개 마을을 돌며 민간인학살을 조사하다 주민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역시 3년간 이곳에서 진료를 하다 쫓겨나 10년째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한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달 28일, 평화기행단은 빈호아사 인민위원회관을 방문했다. 인민위원장의 안내로 빈호아사 초입에 있는 한국군증오비를 찾았다. 증오비 바로 옆에 민간인학살묘지,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열사묘,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가 있다. 증오비는 시멘트비석 제단 왼편에 아기를 안은 채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뻗은 여인과 커다란 책 모습을 형상화했다. 증오비 오른쪽에는 66년 12월, 미제국주의의 용병인 남조선군인이 43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의 비문이 쓰여 있다. 비석 맨 위에는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는 문구가, 비석 아래 제단에는 ‘미 침략 적군에 대한 복수심을 영원토록 깊이 새긴다’는 글이 쓰여 있다. 증오비 오른편에는 도표를 그려 희생자의 현황을 기록했다.

‘430명 가운데 여성은 288명, 50~80세 노인이 109명, 82명은 아이, 7명은 임신부, 2명은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으며, 1명은 목이 잘린 채 죽창에 꽂아 마을입구에 걸어놓았다. 또 2명의 여성은 윤간을 당했으며, 2가족은 몰살당했다.’

평화기행단 일행은 이 기록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국인 작가가 이미 위령비에다 나이와 성별, 사망 시기까지 기록해 놓은 터라 외면할 수 없는 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동행한 베트남 참전군인인 류진춘 경북대 명예교수가 제단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무릎을 꿇고 묘소에 향을 피워 원혼을 위로했다. 정재형 변호사는 얼굴을 돌린 채 애써 담배만 피웠다. 기자는 계속해 셔터만 눌러댔다.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스콜이 한바탕 쏟아질 심사였다.

◆빈호아사 생존자 도안응이아씨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렴. 한국군이 우리를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렴.” 빈호아사 마을엔 이런 슬픈 자장가가 구전돼 온다.

도안응이아씨(48).

한이 서린 자장가를 듣고 자란 그였지만 얼굴엔 항상 화사한 미소가 넘친다.

66년 12월 학살 당시 그는 생후 6개월 된 영아였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살아남았다. 어머니가 총을 맞은 채 그를 끌어안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도 총상으로 엉덩이 일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어머니의 시신 위에 또 다른 시신이 포개졌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신들 가운데 가장 아래에 깔려있었다. 그날도 스콜이 내렸다. 수류탄 파편에 묻은 탄약가루가 빗물과 핏물에 섞여 그의 눈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졸지에 전쟁고아가 된 그는 인근 마을주민에 의해 양육됐다. 5세가 돼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15세 때 주민이 조그만 흙집을 지어 그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학교는 언감생심, 몸이 불편해 농사조차 지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대바구니를 만드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착한 배필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려 1남1녀를 뒀다. 그가 대바구니를 만들면 아내가 새벽시장에 그것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아들의 이름은 ‘위엔 탄빈’(23), 딸의 이름은 ‘위엔 빈인’(20)으로 지었다. 탄빈은 베트남어로 ‘태평’, 빈인은 ‘평안’이란 뜻이다. 그가 얼마나 평화와 안녕을 갈구하는지 자녀의 이름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두 자녀 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지만 가난으로 아들은 중도에 그만두고 코이카베트남이 운영하는 직업훈련학교에 다니고 있다. 동생은 전국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졌지만 고2 때 학교를 그만뒀다. 이 사실을 안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의 한 치과의사가 학비와 생활비를 대 딸은 하노이대학에 다니고 있다. 도안응이아씨가 이날 일행에게 노래를 들려줬다. 서툰 기타솜씨로 부르는 노래였지만 태평과 평안을 담은 노랫가락은 일행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글·사진=베트남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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