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기로 마을 방화·살인…한·미간 외교문제로 비화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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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8   |  발행일 2014-08-08 제35면   |  수정 2014-08-08
●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 마을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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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위령비. 한국의 평화인권단체 ‘나와 우리’가 세웠다.

퐁은 베트남어로 ‘바람(風)’이란 뜻이다. 베트남 중부지역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은 베트남의 주요 간선도로인 1번국도 옆에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은 미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안전마을’로 분류됐다. 이 마을에는 남베트남군의 가족들도 다수 살고 있었다.

퐁니·퐁넛학살사건은 68년 2월12일 한국 군인이 마을로 진입하려다 부비트랩으로 동료를 잃자 마을로 진입해 74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접한 남베트남 군인들이 희생당한 가족의 시신을 1번 국도변에 늘어놓자 미군이 사진을 촬영해 공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이 길은 지금까지 ‘단명의 길’로 불리고 있다.

이 사건은 웨스트모어랜드 주베트남미군사령관에게 보고돼 한·미간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한국 측에서도 중앙정보부가 진상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 측은 한국 측에 사망, 부상, 재산피해 등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할 것과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권고했다. 이 사건은 2000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 보관됐던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의 각종 수사보고서와 20여장의 흑백사진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국방부 측에선 해병 청룡여단이 퐁니로 이동 중 베트콩이 저격하면서 부비트랩에 7명이 희생당하자 퐁니 마을을 적의 소굴로 오인해 박격포로 포격, 민간인 69명을 희생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목격한 미 해병은 폭격은 물론 자동화기로 민간인촌을 습격, 방화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평화기행단은 대구의 찜통더위를 방불케 하는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퐁니 마을 민간인학살위령비를 찾았다. 1번 국도에서 내려 샛길로 1㎞ 정도 걸어가자 드넓은 논 한가운데 하얀 비각이 나타났다. 멀리 마을이 듬성듬성 보인다. 비각 속 위령비 바로 옆에 두 그루의 야유나무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그루는 수령이 족히 300년은 넘은 듯하다. 오래 된 야유나무는 한국의 당산나무와 같단다. 그 나무 바로 옆에 제단이 있다. 위령비 앞 비문에는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야유나무에서 남조선군대에 의해 74명의 인민이 학살당했다. 1968년 2월12일(음력1월14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희생자 74명의 명단이 위령비에 각인돼 있다. 이 위령비는 2004년 한국의 평화인권단체인 ‘나와 우리’ 회원이 이곳 지역민의 요청으로 1천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베트남청년과 함께 건립했다. 처음엔 위령비만 세웠으나 주민이 길을 포장하고 비각까지 세웠다고 한다.

방공호 있던 주민 다 나오라 한 뒤 일렬로 세워 총 쏘고 수류탄 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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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마을 학살 생존자 탄씨가 증언을 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생존자 응웬 티 탄씨의 증언

당시 8세였다. 그날은 1초가 1분, 1분이 10분처럼 느리게 갔다. 필름처럼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지는 전쟁 전에 사망했다. 오빠는 10세, 동생은 3세였다. 엄마는 형제자매를 이모에게 맡기고 시장에 물건을 팔러갔다. 갑자기 마을에 폭격이 시작됐다. 이모는 우리를 데리고 방공호로 갔다. 한국 군인이 ‘다 나오라’고 하면서 최루탄을 던져 방공호 밖으로 나왔다. 군인은 우리를 일렬로 세운 다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젖먹이를 안고 있던 이모가 즉사하고, 오빠는 엉덩이가 날아가 버린 채 쓰러졌다. 세살짜리 동생이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도 배에 상처를 입었다. 오빠가 나를 불러 엄마를 찾자고 했다. 동생을 버린 채 오빠는 엉금엉금 기어갔고 나는 그런 오빠와 함께 ‘엄마’를 부르며 마을을 헤맸다.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타고 마을길에 시체가 널브러져있었다. 불에 타지 않은 어떤 집에 들어가 ‘엄마’를 외치는 순간 한 주민이 나타나 우리를 병원으로 옮겼다. 난 상처가 덜해 다낭병원으로 후송되고 오빠는 독일의료수송선으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1975년에 오빠와 해후했다. 오빠는 성불구자가 됐으며 난 숙부 집에서 자랐다. 나중에 학살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시신더미 사진 속에 엄마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한국 사람을 정말 증오했다. 생존자들은 지금도 그때 일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왜 엄마와 동생을 죽였어요?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증언을 하다 울음을 터뜨리자 무거운 침묵 속에 일행도 훌쩍거렸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눈물을 흘리며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사죄합니다’고 했다)

글·사진=베트남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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