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간디가 농촌문제 해법 될 수 있다…도시인 제2의 인생 개척도 도울 것”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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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13   |  발행일 2015-11-13 제35면   |  수정 2015-11-13
■ 간디문화센터를 끌어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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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유학센터 아이들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탁구를 치고 있다. 방과 후 ‘과외뺑뺑이’에 휘둘리는 도시 아이들보다 훨씬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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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문화센터 주선국 이사장(왼쪽)과 김승주 사무국장(중간), 문창식 센터장이 회의를 하고 있다.


▶ 주선국 이사장
사업·시민단체 활동하다
농촌서 새로운 도전 결심
간디문화센터 설립

▶ 문창식 센터장
1991년 낙동강 페놀사태
시민운동가로 변신
주 이사장과 의기투합

▶ 김승주 사무국장
대구참여연대 등서 활동
3년 전 아이와 함께 정착
어머니·교사 등 1인 다역

◆주선국 간디문화센터 이사장
주선국 간디문화센터 이사장(54)은 대학 운동권 출신이다. 의성 출신인 그는 경북고를 졸업하고 1982년 경북대 심리학과에 입학해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저항하다 강제징집을 당했다. 제대 후에도 87년 6월항쟁 당시 경북대 총학생회 기획부장을 하면서 크고 작은 시위를 주도하다 수배를 받게 된다. 그는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후 대구지역 시민운동에 투신해 KYC(한국청년연합)의 전신인 ‘새로운 청년회’의 창립회원이 된다. 서울로 간 그는 3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IMF 금융위기 때 회사를 그만두고 부도가 난 섬유공장을 인수해 대표를 했다. 2002~2006년, 그는 KYC 전국대표를 하면서 사업을 병행하다 2007년 사업을 접었다. 민화협 산하 청년위원장을 함께 맡아 남북 간 청년교류활성화에 힘을 보태기도 했던 그는 2006년에야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2007년 대선이 끝난 뒤 문창식 센터장 등과 함께 간디문화센터를 열고 간디에 전념하고 있다.

“20여 년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시민단체활동에 전념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지천명이 바로 눈앞에 와 있더군요. 시민운동 선배로서 자리만 차지할 게 아니라 후배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구체적인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주 이사장은 40대 후반에 농촌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하고 문 센터장 등과 함께 뜻을 모아 간디문화센터를 설립했다.

“낮은 곳으로 들어가 하방(下放)을 하고, 풀뿌리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하나의 방편이 간디였습니다. 간디는 농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해법입니다. 농촌을 살리고 일자리도 늘릴 수 있습니다.”

주 이사장은 농촌으로 가서 직접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도 있었다. 간디 인근에 9천917㎡(3천평)의 밭을 구입해 미니사과 나무와 감나무를 심었다. 내년에 수확할 예정인 미니사과는 친환경급식을 하는 곳에 직거래할 예정이다. 그는 또 농사 외에 1차농산물가공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고추와 마늘을 빻고, 참기름을 짤 수 있는 설비를 갖춰 인근에서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주민과 더불어 ‘간디’라는 브랜드로 판로도 개척할 것이다.

“지금 농촌에는 농사를 짓다 버려진 땅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땅을 구입해 도시에서 낙오한 60대 이후의 도시생활자를 시골로 불러들여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생산자조합도 만들어 로컬푸드운동을 활성화하는 한편, 그들이 자영농으로 독립할 때까지 돕고싶습니다.”

◆문창식 간디문화센터 센터장
1991년에 터진 페놀사태는 한 평범한 대기업 사원을 시민운동가로 변모시켰다. 성주 출신인 문창식 간디문화센터 센터장은 90년대 초~2000년대 중반까지 대구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민운동가였다.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페놀사고 당시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아이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페놀이 섞인 수돗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복지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시민단체활동을 뒤에서 돕다 환경운동가가 된 케이스죠.”

문 센터장은 이재용 전 환경부장관, 송필경 생각하는 치과 원장 등이 만든 ‘공해추방협의회’의 창립회원이 되고 실무간사를 맡았다. 이 전 장관이 6개월만 맡아서 해 달라고 했는데 어쩌다 20여 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는 이후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과 처장,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상근활동가로 일하던 중 2003년 필리핀에서 열린 NGO연수프로그램에 1년간 참가하면서 생명, 평화운동을 풀뿌리에서부터 시작하려는 꿈을 꿨다. 2007년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주선국 이사장 등과 함께 간디문화센터를 설립하기로 의기투합하고 직접 페인트통을 들고 센터를 꾸몄다. 간디 곳곳에 그의 땀과 열정이 녹아있다. 학생들은 그를 ‘문깡’으로 부르고 있다. 그만큼 아이들과 격의가 없고 친근하다는 말이다.

“생명, 평화, 나눔운동을 구체적인 활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큰 과제였는데 간디가 그 대안이 됐습니다. 이제 8년이 지났는데 돌이켜보니 당시에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모순이 얼마나 많이 드러났습니까.”

◆김승주 간디문화센터 사무국장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큰아이에겐 태권도를 제외하고 과외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휴일에도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를 보면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승주 간디문화센터 사무국장은 두 아이와 함께 간디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은 한 달에 한두 번 이곳에 온다. 영남대 사범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대구참여연대 등에서 10여 년간 활동가로 일하다 3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그녀는 간디에서 회계업무와 지원사업실무, 상담 등을 하는 한편 어머니, 교사, 사감, 사서 등 1인 다역을 맡고 있다.

“오후 4~5시가 되면 아이들이 퇴교를 합니다. 이후엔 축구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 등 자유시간을 갖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영화 보고 토론하기, 독서, 텃밭 가꾸기, 영상 제작하기 등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아이들이 먹는 부식은 대부분 자급자족입니다. 무, 배추, 파, 감자, 고구마 등은 텃밭을 이용해 직접 재배하고 친환경계란도 생산해 판매합니다. 시골살이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게 하고 농사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며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 같아요. 또 공동체생활을 통해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김 국장은 내년 중학교에 진학할 6학년인 큰아이를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학교로 보낼 예정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경북지역 농촌유학 실행지

▲시골살이 아이들(http://blog.naver.com/snsclick) 예천군 호명면 백송길 75(010-5375-2657)

▲아침연꽃 산촌유학(http://blog.naver.com/mioktree)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길 48(010-4769-1335)

▲청량산 풍경원 산촌유학센터(http://www.punggyeong.com) 봉화군 명호면 양삼길 43(010-4920-3136)

▲우리손 농촌유학센터(http://cafe.daum.net/byourhands) 영양군 수비면 계리 512-2(054-683-2853)

▲영덕 농촌유학센터(http://blog.daum.net/limser1023) 영덕군 영해면 대동로 1224-15(010-5357-9043)

▲도리 농촌유학센터(http://cafe.daum.net/dory1398) 경주시 서면 도리 1398(054-751-6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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