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쉰, 어른이 되고 싶진 않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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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03   |  발행일 2016-06-03 제33면   |  수정 2017-10-23
[人牲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신효철 <사>방정환 한울학교 추진위원
20160603
피눈물 흘리며 죽어간 한말 동학교도와 그 지도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대구 바보주막 한쪽 벽에 그려진 ‘사람이 하늘이다’란 메시지의 동학인물 벽화. 친구 김병호 화가가 그린 이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효철 추진위원은 동학정신이 새마을운동 이상으로 승화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얼마 만인가! 무심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비울 건 비우고 채울 건 채운, 그래서 이제 내 인생 얘기를 조금 토로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란 얼마나 심오하고 심원한 영역인가. 나는 나를 많이 지우면서 살아왔다. 우린 얼마나 나한테 잘 속아 넘어가는가. 대다수 이기적인 나한테 감금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나날을 보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서자 취급하는 그 민족 종교, 아니 민족 사상 때문에 난 나를 비교적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나를 잊을 때 참나(眞我)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심호흡을 해 본다.

‘하늘과 내가 한 호흡으로 살고 있다’고 주문(呪文)을 외운다. 주문이란 나를 잘 보기 위해 나를 버리는 행위다. 난 기도보다 주문에 더 익숙하다. 평생 한 손에는 ‘동학’, 또 한 손에는 ‘천도교’를 움켜쥐고 민족종교운동가처럼 살다간 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었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란 말에 최면이 걸려 살아온 탓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쉰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아직 혼자다. ‘마흔 후반의 어린이’랄까. 지금 이 나라의 숱한 인문학 토크는 어린이에 대한 맘 챙겨 주기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게 찾아낸 호들갑이다. 어른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무섭다는 걸 알아야 된다.

다들 말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맘은 권력과 황금 만능에 길들여져 있다. 그 맘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아이는 건너뛰고 어른부터 되는 것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른이 아니고 어린이다. 세월호도 어른이 아니라 아이의 눈으로 해법을 찾아야 되지 않았을까?

‘어린이=어른’인 세상은 언제 가능할까. 언젠가부터 이 나라에선 참어른을 참 보기 힘들다.

난 솔직히 어른이 되고 싶지가 않다. 평생 어린이로 살다 죽을 것 같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는 없는 자의 절규가 터져나오는 각종 시위농성 현장에 동참할 때다.

모처럼 개량 한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가방을 굳게 쥐었다. 중구 계산동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 옆 적벽돌 골목길을 걷는다. 내가 독립군이 된 기분이다. 그 모습을 본 지인들은 내가 꼭 ‘과거를 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말뜻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시대와의 불화를 겪고 있다’는 뜻일 게다.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뭐랄까, 좀 ‘바보’같은 효철이. 그럴지도 모른다.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를 쉽게 폄훼하는 이도 있지만 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바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상화 시인의 친형이자 일제 때 독립운동가였던 이상정 장군이 사시던 집에 들어선 ‘대구 바보주막’이 오픈할 때도 참여했다. 낮술을 마신다. 취기는 자꾸만 날 유년시절로 끌고 들어간다. 타인에겐 한없이 조화로웠지만 우리 가족에겐 ‘불화’였던 아버지의 그림자 곁으로.

◆아버지는 동학교도였다

봉화군 물야면 북지1리 태백산 끝자락인 매봉산 자락.

내 고향이다. 여느 시골이 아니다. 깡촌보다 더 궁벽한 산골이다. 내가 초등 6학년 때 겨우 전기가 들어왔다. 선천적인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단군정신 선양회 경북 북부 지방 간부로 동학과 단군정신 전파에 일생을 헌신하신 아버지. 그 사이에서 6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집은 여느 가정집이 아니었다. 동학의 한 교당이었다.

나는 공부보다 자연을 더 좋아했다. 등하굣길 산과 들녘의 야생초 열매 등으로 허기를 채우기 바빴다. 툭하면 소를 몰고 꼴(풀)을 먹여야만 했다. 소죽도 끓이고 도축할 때 나온 돼지불알에 바람을 넣어 축구도 했다. 비료 포대를 접어 야구글러브, 비닐을 노끈으로 묶어서 야구공까지 만들었다. 겨울에는 산토끼, 꿩, 노루, 멧돼지를 잡으러 다니고 가을에는 송이, 능이버섯을 캐며 원시인처럼 살았다.

남한테는 한없이 호인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집안살림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됐다. 한량같은 종교인이랄까. 난 그런 아버지가 내내 미웠다. 어머니에겐 휴식이 일절 없었다. 디딜방아·맷돌처럼 사셨다. 평생 일뿐이었다. 형과 누나는 이런 집안 사정 때문에 모두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꿈을 포기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만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고3 때 가세는 최악이었다.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은 어려웠다. 등록금만 보태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맞섰다.

당시 우리 집안은 타인들에겐 좀 불온하게 보였다. 60~70년대 동학·홍익·평등사상 운운하면 ‘빨갱이’로 곡해되거나 사상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당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한국의 여러 민족종교가 모두 동학 사상에서 출발했는데 정작 한국인은 한국적인 믿음체계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다”면서 개탄스러워했다.

아무튼 난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동학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새벽마다 외웠던 동학의 주문은 의미도 모른 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난 아버지의 역사보다 학교 교과서를 더 믿었다.

내 앞에는 내가 생애 처음 맞이하게 될 냉혹한 현실이 자객처럼 다가서고 있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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