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혈처럼 피었다 지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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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14   |  발행일 2016-10-14 제33면   |  수정 2016-10-14
[이춘호기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3부 가을 이야기-전남 영광
선혈처럼 피었다 지다
초가을 전남 영광군 전체를 노을처럼 붉게 물들이는 불갑면 불갑산 불갑사 초입의 상사화의 한 종류인 꽃무릇 단지. 피어난 지 1주일도 안돼 꽃은 지고 찬바람을 맞으며 뒤늦게 피어나는 잎은 더욱 애절함을 더해준다. 불갑사는 함평의 용천사와 전북 고창 선운사와 함께 국내 3대 상사화 명소로 유명하다.

그때는 피었고 지금은 져버린 안타까운 꽃 하나. 바로 ‘상사화(相思花)’다. 낙타의 눈썹 같은 그 꽃잎. 그 놈이 화엄의 강을 이루는 초가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산 불갑사 일대는 노을이 땅에서부터 돋아난다. 붉디붉은 상사화의 절규 때문이다. 그 절규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전라도 영광 쪽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출발시각은 오전 2시30분. 새벽과 아침이 겹치는 시각에 가장 황홀한 자태를 분출한다는 불갑사 상사화를 친견하기 위해서다. 여름날에는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풀과 흙내음이 섞인, 조금은 비릿한 기운이 차 안으로 들이쳤다.

목포와 무안까지는 경상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함평~영광~장성~고창~정읍~부안~김제 권역은 좀처럼 가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관광명소만 편식해버린 후유증이랄까. 이들 지역은 한말 동학과 민란의 고장이었다. 갯벌 같은 소작농의 비애와 굴곡진 애환의 기운이 곳곳에 묻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붉은 황토가 발달돼 있다.

상사화 피는 굴비의 고장인 ‘영광(靈光)’. ‘혼령스러운 불빛’, 그 지명에 영험하고 성성한 기운이 감돈다. 덕분에 에너지와 빛(영성)과 관련된 인프라가 푸짐하다. 영광원자력발전소는 물론 국내에서 가장 높은 노을전망타워와 2.3㎞ 목재 데크형 해안노을길까지 가진 백수해안도로(백수읍 길용리~백암리 석구미 마을·16.8㎞)까지 거느리고 있다.

뿐만 아니다. 불교, 기독교, 원불교, 천주교 등 한국 4대 종교 문화의 돈독한 기운까지 동시에 혼융돼 있다.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불교를 법성포를 통해 최초로 갖고 들어왔고,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탄생지가 영광이어서 원불교 영산성지까지 세워진다. 6·25전쟁 당시 194명이 순교한 기독교순교지는 염산면 설도항 근처에 있다. 조선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도들이 순교한 순교지도 영광읍에 있다. 영광으로 접어들면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잠시 묵념을 했다.

굴비로 유명한 영광의 가을은 단풍보다 더 먼저 물드는 꽃이 있다. 불갑산(해발 516m) 상사화다. 나무 아래 무리지어 핀다고 해서 ‘꽃무릇’, 돌틈에서 나오는 마늘을 닮았다고 ‘석산(石蒜)’으로도 불린다. 꽃대 끝에서 여섯 개의 작은 가지가 갈라져 나온다. 가지마다 꽃이 하나씩 핀다. 이 작은 꽃마다 일곱 개의 꽃술이 달린다. 상사화는 여러 종교 중에서 불교와 가장 궁합이 맞다. 인문학적 의미도 사뭇 불교적이다. 불가에서는 ‘여섯 개의 꽃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실천수행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이 여섯 개의 꽃이 총화로 모여 한송이의 아름다운 상사화를 이룬다. 세계일화(世界一花) 혹은 우주일화(宇宙一花)랄까.

상사화는 ‘가을 목련’ 같았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에서 잎도 없이 고혹한 빨강을 자랑하다가 채 일주일도 안돼 서리맞은 풀잎처럼 시들어버린다. 꽃이 꺼져야 비로소 잎이 켜지는 식물.

올해 불갑사 꽃무릇 축제는 지난달 끝났다. 축제가 끝난 바로 직후라 여독이 풀리지 않은 꽃무릇 단지는 피곤한 기운이 역력했다. 솔직히 축제기간, 숱한 인파 속에서 상사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카메라를 대동하고 일주문을 지나 어둠 속 오로라처럼 밝아져 올 상사화를 벤치에 좌정하고 기다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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