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의 융숭한 대접 받은 듯…정갈한 밥상에 넘치는 최부잣집 인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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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5   |  발행일 2016-11-25 제34면   |  수정 2016-11-25
■ 푸드로드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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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용에서 지금은 일반 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경주 ‘최가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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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석궁의 메인 반찬인 멸장·집장·육장·육포.

10년前부터 반가 한정식 전문‘요석궁’
육장·집장·멸장 등 발효 가득한 밑반찬
별난 김치 ‘사인지’·진상도 한 ‘수란채’
그 옆 ‘최가밥상’의 육개장 별미 꼽혀

자운사 혜연 스님이 운영하는 ‘향적원’
육개장 닮은 승가 별식 ‘채개장’ 일품
또다른 연요리 전문점으로는 ‘하연지’


경주 최부자가 꾸려가는 요석궁(瑤石宮). 상업화된 경상도 반가음식 중 비교적 가풍을 고수하는 곳으로 인정받는다. 요즘 전국 유명 한정식이 너무 퓨전으로 치닫는데, 여긴 튀지 않고 담담하게 기본에 충실하다.

와송(臥松)이 압권인 정원. 풍류 가득한 사랑채로 평가받는 ‘수재당(守齋堂)’ 등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1920년대 스웨덴 구스타프 왕이 세자이던 시절, 신혼여행 중 경주 서봉총 발굴 소식을 듣고 왔다가 이 집에서 묵었다. 6·25전쟁 때 의료단으로 참전한 스웨덴군이 자국 왕실의 요청으로 최부잣집 안채 사진을 샅샅이 찍어 가기도 했다. 식당으로 변한 지난 10여 년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등 굵직한 외교사절들이 가장 선호하는 반가 한식당 1순위로 자릴 잡았다. 그래도 여전히 일반인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요석궁. 솔직히 식당 상호가 너무 육중한 것 같다.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 그 언저리에 애잔하고 풋풋하고 서글픈 구석이 많다. 요석궁은 요석공주가 기거한 곳. 원효가 남천의 느릅나무 다리에서 떨어진 인연으로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게 된 것도 바로 여기다. 요석궁 옆 다리는 이제 ‘월정교’로 복원됐다.

350여 년 전 요석궁의 새 주인이 나타난다. 최부자 가문의 터를 다진 최언경이다. 경주최씨는 원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터 잡고 살다 250년 전에 교촌으로 이사했다. 그때 내남에 있던 집을 뜯어 옮긴 것이다. 하지만 금싸라기 같은 이 세거지는 문파 최준에 의해 1947년 대구대(영남대 전신)에 기탁된다. 그로 인해 가문은 급속도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훗날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 기탁은 자의보다 타의가 컸고, 훗날 영남대와도 소원한 관계가 된다.

최인환이 71년 요석궁이란 요정을 차린 것도 호구지책의 일환이었다. 2005년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아들 재용씨가 칙칙했던 요석궁을 반가 한정식 전문점으로 산뜻하게 리모델링한다. 요석궁 옆 ‘최가밥상’으로 가면 또 다른 별미가 있다. 예전 과객들을 위한 독상 차림으로 나오는 걸쭉하기 이를 데 없는 1만3천원짜리 ‘최가육개장’이다.

◆음식을 위해 제를 올리다

가장 인상적인 건 메인 음식이 아니다. 사철 변하지 않는 발효 가득한 밑반찬이다. 감질나게 담겨 나오는 육장·집장·멸장·육포·명태보풀·사인지·어만두…. 음식에서 종부의 손길이 느껴진다. 전남 강진의 ‘해태식당’, 해남의 ‘천일식당’, 담양의 ‘전통식당’ 등 유명 남도 한정식당과는 요리의 질감이 사뭇 다르다.

‘육장’은 태양초 고추장에 최고급 한우를 갈아 넣은 일종의 ‘소고기고추장볶음’이다. ‘집장’은 직접 재배한 국산 콩을 메주로 띄운 뒤 그 메줏가루에 다시마와 부추, 무, 한우 등 몸에 좋다는 20여 가지 재료를 넣고 약불에 10시간 이상 졸여 낸 정성 만점 밑반찬이다. ‘멸장’도 땀의 결정체. 최상의 마른멸치의 내장을 다 빼낸 뒤 멸장용 기름기 없는 정육으로 육수를 만들어 2~3일 그늘에서 말린 무와 고추장을 넣고 양념해 뭉근한 불에 조청 만들 듯 5~6시간 졸여 만든 밑반찬이다.

‘사인지’는 최부잣집에 시집온 며느리의 고단함과 사연이 스며들어 있다. 갖가지 재료를 장만하는 게 너무 힘이 들어 사연이 많은 김치라고 해서 처음에는 ‘사연지’로 불렸다. 국물이 자박한 보쌈김치처럼 보인다. 그 깊은 맛은 흡사 동굴 속 천연수를 방불케 한다. ‘수란채’는 임금한테도 진상됐다고 한다. 잣 국물에 전복과 해삼, 문어, 대게 등을 넣고 쑥갓으로 향을 더한 후 계란과 건고추, 석이버섯 등으로 고명을 올려놓는 영양식이다.

음식도 하나의 정성이다 싶어 전 직원이 맘을 다해 매월 음력 초하루엔 음식을 위한 ‘식제(食祭)’까지 올린다.

◆최부자의 가양주…교동법주

경주에서 가장 신라스러운 음식을 논할 때 등장하는 술이 있다. 바로 ‘교동법주’다. 그 술이 왠지 신라스러움과 경주스러움의 접점 같다. 교동법주가 문배주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 가양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범상치 않았던 경주의 우물 때문이다. 나정, 쪽샘 등 경주에는 샘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현재 경주향교에 신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요석궁우물’이 잘 보존돼 있다. 요석공주·원효·설총도 이 우물물을 먹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짜서 식수로는 사용 못 한다. 학계에 따르면 경주의 우물은 211개가 확인되고 그중 60개 정도에서 물이 고인다고 한다.

교동법주는 법이 정한 대로, 즉 ‘정석대로 빚는다’는 뜻이다. 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9대조인 최국선. 그는 조선조 숙종 때 수라상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참봉 벼슬을 지냈다. 사옹원 참봉은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음식 담당이라 사대문 밖 사람은 쓰지도 않고 충신의 자손 아니면 부르지 않았다. 며느리들은 대대로 법주 빚는 법을 전수했다. 배영신 여사가 법주 기능보유자이며, 2009년 아들 최경씨가 대를 이었다. 물론 요즘 대량 생산되는 경주법주와는 족보가 전혀 다르다. 집안 우물 곁에 있는 100년 된 구기자나무가 술맛의 비밀이었다지만 요새는 물이 오염돼 그 우물물을 쓰지 않는다.

◆향적원과 하연지의 연요리

경주에 오면 특이한 연요리 전문점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마동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원 맞은편에 있는 사찰요리전문점 ‘향적원’이고 또 하나는 탑동에 있는 ‘하연지’다. 두 곳 모두 경북도가 정한 신라역사문화음식점으로 지정됐다. 두 식당 모두 10년 전에 문을 열었다.

‘향적원’은 자운사 주지 혜연 스님이 운영한다. 연자죽, 치자누룽지탕수, 콩가스, 콩불고기 등을 내는데 가장 인상적인 건 나물과 채소를 넣어 개발한 사찰표 육개장인 ‘채개장’이다. 먹어본 사람은 ‘이게 정말 채소를 갖고 끓인 것 맞냐’고 할 정도로 고기로 끓인 육개장 같다. 채개장은 승가의 별식으로 느타리, 표고, 양송이, 새송이, 고구마줄기, 토란대, 고사리, 숙주나물, 양상추, 깻잎, 시래기 등으로 끓이고 마지막에 들깻가루를 첨가한다. 고기 맛을 느낄 수 있게 콩고기도 조금 넣는다.

‘하연지’의 김정련 사장은 주연급 조연으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영화배우 김상호의 누나다. 밑반찬으로 내는 양파절임은 테크닉을 발휘해 연꽃처럼 피워올렸다. 김 사장은 2만8천원짜리 원효반상과 선덕반상을 차리면서 지진 피해 등 세상 시름을 많이 잊게 된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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