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마지막 음악감상실이 문 닫던 날, 마지막 DJ도 나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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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2   |  발행일 2017-09-22 제34면   |  수정 2017-09-22
■ ‘한국 2세대 DJ’ 김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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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이어폰세상이지만 그래도 추억의 DJ에겐 동절기 푹신한 귀마개 같은 촉감의 헤드폰이 제격이다. 레코드숍에 진열된 빛바랜 헤드폰을 쓰고 DJ 전성기를 회상해보고 있는 김윤동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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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동 DJ는 틈만 나면 교동시장 전자골목 한 편에 있는 대지레코드 등을 찾아 청취자에게 들려줄 만한 숨은 명앨범을 찾아낸다.

어느 날 누나와 두 형이 집에서 사라진다. 각자의 길을 찾아 집을 떠난 것이다. 혼자 남은 나날이었다. 외향적인 내 성격은 극도로 내성적으로 변한다. 은둔의 나날이었다. 종일 음악만 들었다. 음악은 외로움을 망각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 돌파구는 가출뿐이었다. 고교 2학년 때 집을 나온다. 84년 난 당시 단전호흡 돌풍을 일으킨 김정빈의 소설 ‘단(丹)’에 매료됐다. 85년 겨울, 아예 친구와 계룡산에 입산한다. 삶의 끝을 보기 위해서다. 친구는 무예와 도술, 난 음악예술의 한 진경을 터득하고 싶었다. 막상 도착하니 너무 추웠다. 도사는 무슨… 빌어먹을, 황량한 산하만 보였다. 야외에서 캠핑하며 이틀을 버텼다. 동사 직전이었다. 생각이 돌변했다. 작전상 후퇴. 나 때문에 모처럼 비상 가족회의가 열렸고 4개월간 설득공방전 끝에 난 DJ가 될 수 있었다.

고2 때 가출…돌아와 4개월 가족 설득
코리아음악감상실서 꿈처럼 DJ 데뷔
중저음 목소리 듣는 순간 선배 “OK!”
면접 바로 다음날부터 1시간 진행 꿰차

음악감상실 DJ 역사가 막 내린 이듬해
대구TBN서 영화코너 맡다 진행자로
2007년부터‘낭만이 있는 곳에’DJ 활약


◆ 코리아음악감상실을 노크하다

첫 출격지는 당시 꿈의 음악감상실이었던 ‘코리아음악감상실’. 이 감상실은 중구 화전동 송죽극장 맞은편 코리아백화점에 있었다. 화재가 나는 바람에 1970년대 중반에 리모델링된다. 여긴 청년문화의 창구였다. 지하에 코리아다방, 3층에 파도클럽, 4층에 음악감상실, 5층에 코리아 디스코텍이 있었다. 규모부터 남달랐다. 400석 규모의 감상실, 2만여장의 LP, 뮤직박스도 파격 그 자체였다. 비행기 기장석을 연상시켰다.

난 바로 호랑이굴인 코리아감상실로 쳐들어갔다. 당시 거기 대장은 음악실장이었던 김용철 선배였다. 그는 큰 산이었다. 다짜고짜 “커피 한잔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미 내 맘을 읽고 있었다. 중저음의 내 음성과 눈빛에서 DJ 운명을 읽은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충분히 얘기하기 위해 일부러 긴 곡을 턴테이블에 걸었다. 비 오는 날의 우수가 진하게 묻어 있는 10분짜리 자넷 맨체스터의 ‘투모로 이즈 메모리즈’였다. 선배니깐 용서됐지만 다른 DJ 같았으면 해고감이었다. 그만큼 업주는 긴 곡을 싫어했다. 국내에는 더 긴 곡도 있다. 조용필의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는 17분가량 된다.

대뜸 난 “형님 자리에 앉고 싶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선배도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갖다 대주면서 “멘트 한번 쳐봐!”라고 했다. “자넷 맨체스트의 노래입니다~” 순간 홀 가득 울려퍼지는 중저음의 내 목소리. 그것으로 상황 끝!

DJ 양성기관은 없다. 순전히 도제식으로 길러진다. 뮤직박스 내부 음향기기의 본질을 터득하고 나면 멘트 스킬 배우기. 최소 1년은 시달려야 된다. 좀 오버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맞기도 하고 꿇어앉아 음반을 드는 벌도 서슴지 않았다. 그땐 다들 그런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난 그런 과정 없이 면접 바로 다음 날부터 내 타임을 가졌다. 오후 3시부터 1시간이었다. 이 바닥에선 드문 케이스다. 그 선배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코리아의 명성답게 그 유명한 김광한 DJ, 그리고 가수 김현식까지 방문했다.

◆ DJ도 파벌이 있었다

나의 하루는 동성로에서 시작해 동성로에서 끝이 났다. 나는 동성로파 DJ였다. 한번은 동성로·향촌동파가 전쟁을 벌였다. 당시 난 옛 런던제과 옆 골목 안에 있던 시보네 음악감상실에 있었다. 당시 여러 주점 등이 습격당했는데도 음악감상실만은 희한하게 무사했다. 가끔 조폭들이 내 감상실에 놀러왔다. 그런데 입장료도 끊고 얌전히 감상하다가 아주 선량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그게 음악의 힘이라 여겼다.

시보네 이후 한일극장 쪽으로 올라가서 무아, 에뜨랑제 등 여러 감상실을 돈다. 계명대 쪽은 포엠, 한진다방, 영진전문대 근처는 영빈관 등에 머물렀다. 당시 동성로권 DJ는 얼추 50~60명. 초보 월급은 2만~3만원 선. 당시 내 월급은 6만~10만원. 워낙 경기가 좋아 통기타 가수처럼 여러 곳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녔다. 많을 때는 하루 7타임. 마치고 5분 내 다른 음악실에 가려면 밥 먹을 겨를이 없다. 에뜨랑제에서 포그니까지 가려면 거리는 가까워도 느긋하게 밥 먹을 시간은 없다. 자연 노점에서 계란, 어묵, 떡볶이 등으로 허기를 지워냈다.

DJ도 서열의식이 있다. 음악다방과 일반다방, 변두리와 시내, 시내도 동백(동아백화점)과 대백(대구백화점)권 DJ 간의 자존심 대결은 오래 지속됐다. 가장 천대받는 건 나이트클럽 DJ였다. 우린 그들을 ‘무당’이라 했다. 음악감상실 DJ들도 코리아와 행복의섬, 두 파로 양분됐다. 행복의섬은 객석 인터폰, 레이저디스크 등 때문에 코리아를 밀어낼 수 있었다. 물론 다운타운 DJ가 방송국에 진출하면 그건 ‘슈퍼갑 DJ’가 된다. 그들은 다운타운 DJ에겐 시기와 질투의 대상. 그런데 빅토리아 음악감상실은 ‘독불장군’이었다. 여느 감상실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파격적이고 아방가르드했다. 옥상에서는 대마초파티가 빈발했다.

에뜨랑제 시절 난 대구호러무비클럽 초대회장을 맡는다. 어느 날 으스스한 엑소시스트 3편을 보고 있었다. 옥상 환풍기 속으로 비명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놀란 1층에 살던 할머니가 경찰에 신고했다. 새벽에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즉시 환풍기를 밀봉해버렸다.

80년대 중반, 대백권이 도심 상권의 중심이 된다. 얼추 20여개의 음악감상실이 포진한 것 같다. 동백권에는 코리아·빅토리아·카네기·시보네·안단테·쉘부르·김병규음악실·크로바, 대백권에는 행복의섬·포그니·무아·아카데미·아도니스·에뜨랑제·후에 르네상스·토털·너랑나랑·영시네마·루프 등이다. 대학가 쪽에도 괜찮은 음악다방이 많았다. 계명대 쪽은 핸덱스, 곰11, 포엠, 한진음악다방, 고산음악다방, 마파람 등이다. 경북대권은 정문 쪽에 백악관, 후문 쪽은 하야로비·캠퍼스, 영진전문대 방면은 영빈관·빌보드 등이 포진해 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대구에서 제일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가수 문무상이 운영하던 동성로 금곡삼계탕 근처 ‘엑스트라’에서 들국화 멤버들과 밤새워 술을 마셨다. 포엠다방에선 ‘무정블루스’를 부른 강성모와 건배했다.

◆ 드디어 방송DJ가 되다

2001년 5월 대구의 음악감상실 DJ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마지막 감상실인 포그니(사장 배창범)가 문을 닫은 것이다. 포그니의 마지막 DJ가 바로 나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오후 6시 타임이었다. 마지막 곡으로 카멜의 ‘롱굿바이’를 올렸다. 고별 멘트는 이랬다. “생각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생각나는 것들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음악인생이 제 인생처럼 모순덩어리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지만 쉼표라고 생각하고 저는 잠시 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94년 대구KBS에서 ‘김윤동의 영화마을’을 진행했다. DJ이면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했다. MBC FM 팬북이란 잡지에 ‘김윤동의 영화마을’을 연재했다. 한때 ‘정오의 희망곡’ 진행자였던 전명희씨(현재 영화감독)와 대구기독교방송국 주최 가스펠음악회를 대구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잠시 외도도 했다. 26세 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니 생활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에 1년 정도 다녔다. 못 견디겠더라. 그래서 다시 원대복귀했다.

동아쇼핑 문화담당자가 내게 제안했다. 대구 첫 아티스트클럽을 만들어보자고. 지역에선 처음으로 레이저디스크로 영화감상회를 무료로 진행했다. 그때는 서울발 공연문화가 일천할 시절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지역 팝 마니아를 위해 퀸, 야니, 레드 제플린, 사이먼 앤 가펑클 실황공연을 보여줬다. 지금은 ‘후진 얘기’라 할지 모르겠지만 그땐 첨단 중 첨단의 영상이었다.

2002년부터 대구교통방송에서 영화코너를 진행하다가 2003년에 정식으로 오전 프로를 맡게 된다. ‘뮤직데이트’였다. 김덕일, 김민중, 김태주 PD 등과 호흡을 맞췄다. 2007년 11월에 ‘김윤동의 낭만이 있는 곳에’를 맡았다. 이 프로는 예전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 급이라 보면 된다. 원래 작고한 김광한 DJ가 대전교통방송에 있을 때 이 프로를 기획한 건데 이젠 전국교통방송이 공유하고 있다. 김병규, 한인규 선배 등이 내게 앞서 이 코너를 잘 다져주었다.

지금 난 이 프로를 통해 새로운 변신을 했다. 밤 11시부터 15분 정도 ‘해피믹싱’이란 포맷으로 나이트DJ 톤의 멘트를 잽처럼 날린다. 묵직했던 지난 시절의 김윤동을 잊었다. 조금은 촐싹대는 액션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본조차 없다. 추임새랍시고 두두둥~ 드럼 소리까지 낸다. 슬픈 사연도 경쾌·발랄하게 소개해줬다. 문자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예요, 윤동씨, 미친 거예요, 대박, 밤 시간에 이런 반전이…’ 같은 격려와 함께 ‘지금 뭐하는 거냐’는 야유도 있었다. 그만큼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이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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