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악의 평범성: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 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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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3   |  발행일 2021-12-23 제23면   |  수정 2021-12-23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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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 경북부장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로 보내는 유대인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알면서도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했다. 수많은 유대인이 고통스럽게 죽을 것을 알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악마'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 패망 이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가서 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붙잡혀와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졌을 때 그의 모습은 달랐다.

미국 잡지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그는 아주 정상적이었으며 평범했다고 봤다. 무능력하게까지 보이는 그가 어떻게 끔찍한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까?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담은 아렌트의 기사 내용이 1965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출판됐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라고 적고 있다. 사유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의 행동은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아이히만은 타인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조차도 통상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이 책의 부제가 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나온다. 악의 평범성이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만나고 '악의 평범성'이 논란이 됐던 시기로부터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악의 평범성'에 노출되어 있다. 최근 대통령 선거라는 거대 정치 이슈 속에서 더욱 일상적이 됐다. 가장 흔한 게 '가짜 뉴스'다. 거짓은 동일집단의 힘을 빌려 '진짜'로 둔갑하고 더 큰 '거짓'으로 자가발전한다.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아주 열심히 행동하는 사람일 뿐이며, 동일 집단 내에서는 가짜뉴스도 칭찬받는 일이다. 이들이 저지르는 일들은 일상적이며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가짜 뉴스에 대한 죄책감이나 반성, 잘못에 대한 인식도 없다.

허위 경력 기재나 문서위조 등 일반인이라면 생각지 못할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는 것도 얼마나 그런 일들이 그들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평범한 일상인지 생각하게 한다. 대학입학을 위해 봉사활동 실적을 만들어내거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경력을 부풀리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니다.

가짜 뉴스를 비롯해 허위 경력이나 문서위조 등 많은 일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고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악'이 아니고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일이라는 '평범성'을 들이대면서 '악'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런 일들이 아이히만이 행한 일에 비해 경중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은 크기에 관계없이 사람의 인격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병들게 한다.

양심이 죽었던 세상에서 아이히만의 악마 같은 행동은 다른 독일사람들에게 그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로 비쳤을 수 있다. 이미 그 사회는 헤쳐나올 수 없을 만큼 병들었기에 '악'을 가려낼 수 있는 판단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도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을 제대로 제재하지 않고 '평범성'으로 치부해버린다면, 다시 올바른 사회로 되돌리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전영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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