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팔여(八餘)거사… 행복은 욕심을 줄일수록 커지는 것,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 갖추는 것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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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11   |  발행일 2022-03-11 제34면   |  수정 2022-03-11 08:22
보리밥 배불리 먹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보고, 봄날의 꽃 마음껏 감상…
사재 김정국이 일곱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팔여'를 누리며 청빈한 삶
직장·용모·건강·자식 등 삶의 모든것이 만족스러운 마음이 '행복' 좌우
살만해졌지만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은 먼 곳에 머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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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지를 화병에 꽂다가 떨어진 매화 봉오리를 물 몇 방울이 남아있는 찻잔에 놓아두었더니 이렇게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욕심 많은 사람처럼 물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꽃피우기를 포기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내가 행복하려면 어떤 게 가장 필요할까. 부자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권력이나 명예를 누리면 행복할까.

선현(先賢)들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행복은 욕심을 줄일수록, 만족할 줄 알수록 커진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부자'라고 했고, 톨스토이 또한 '욕심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생은 행복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옛사람들의 글이나 일화를 자주 접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도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먼저 '팔여(八餘)거사'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네가 쉬지 않고 집을 짓는다는 소문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다네. 남들이 전하는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차라리 그런 짓을 그만두고 조용히 살면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70세를 산다면 가장 장수했다고 한다네. 가령 나와 자네가 그렇게 장수하는 복을 누린다고 해도, 남아있는 세월이라야 겨우 10여 년에 지나지 않네.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말 많은 자들의 구설수에 오를 짓을 사서 한단 말인가?

내 이야기를 해보겠네. 나는 20년을 가난하게 살면서 집 몇 칸 장만하고 논밭 몇 이랑 경작하며,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 몇 벌을 갖고 있네.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 이 여러 가지 남은 것을 자산으로 삼아 한세상을 으스대며 거리낌 없이 지낸다네.

천 칸 되는 고대광실 집에다 온갖 쌀밥을 먹고, 비단옷 백 벌을 갖고 있다 해도 그따위 물건은 내게는 썩은 쥐나 다를 바 없네. 호쾌하게 이 한 몸뚱어리를 붙이고 사는데 넉넉하기만 하네.

듣자니 그대는 옷과 음식과 집이 나보다 백배나 호사스럽다고 하던데, 어째서 조금도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는 하네.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지.'

사재(思齋) 김정국(1485~1541)이 친구인 황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寄黃某書)의 일부다. 황 아무개가 늙어서도 계속 집을 짓는 등 호사스럽고 욕심 사납게 산다는 소문이 들리자 보낸 충고의 편지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김정국은 고양팔현(高揚八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고양팔현은 경기도 고양에서 배출된 대표적 조선 선비 8명(남효온·김정국·기준·정지운·민순·홍이상·이신의·이유겸)을 말한다.

초가집

김정국은 대구(현풍) 도동서원에서 기리고 있는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기도 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로 삭탈관직을 당해 경기도 고양 망동리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썼다. '팔여(八餘)' 라는 아호는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라는 의미다.

김정국은 위의 글 중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臥外有餘地, 身邊有餘衣, 鉢底有餘食)'란 대목에서 '세 가지 남은 것(三餘)'이란 말을 가져와 '삼여거사(三餘居士)'란 호를 짓기도 했다.

한 친구가 새 호 '팔여'의 뜻을 물었다. 이에 김정국은 이렇게 답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이런 말을 건넸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내 자네를 따라서 여덟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속물을 따라서 부족함을 걱정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네 그려.'

김정국은 망동리에서 20여 년 동안 '팔여'를 누리며 청빈을 즐겼다.

'삼여(三餘)' '팔여(八餘)'의 '여'는 '넉넉하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불만이나 불행은 대부분 남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살아가는데 무엇이 실질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나은 이들과 비교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불만을 자초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넉넉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갖느냐 여부가 관건이다. 김정국이 넉넉하다고 여기는 세 가지 '삼여'에 속하는 의식주를 비롯해 직장이든, 용모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삶의 모든 환경을 넉넉하게, 만족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행복 여부를 좌우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런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각박하게 살지 않아도 될 만한, 만족하며 살아도 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오히려 넉넉한 마음을 잘 내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과욕을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살 만해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힘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은 여전히 자신과는 먼 일이 될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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