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1] 중국 산시성 기산(岐山)...王이 성덕 베풀어 태평성세,봉황이 내려와 춤추고 노래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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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01 08:11  |  수정 2023-01-20 08:14  |  발행일 2022-04-01 제35면

주공묘
중국 산시성 기산에 있는 주공묘. 기산 능선 위에 있다. 뒤쪽에 근래 만들어 세운 봉황탑이 보인다.

봉황은 전설 속의 새다. 이 봉황은 천자(왕)가 천하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나타나 운다. 그래서 성군(聖君)을 상징하기도 한다.

당나라 문학가이자 정치가인 한유(韓愈)는 '송하견서(送何堅序)'에서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황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했다.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는 "옛날 왕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古之王者 其政好生惡殺 鳳在列樹)"라고 했다.

봉황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오는 5월10일 취임하는 새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 태평성대를 펼쳐 이 한반도에 봉황이 내려와 노래하기를 모두가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국민의 행복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한다면, 봉황이 대통령 문장(紋章)에만 갇혀 있지 않고 거기서 날아올라 국민 모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봉황의 전설 시작된 산시성 봉황산
中문화 뿌리·이상국가 周나라 발상지
최고 성인 '원성'으로 추앙받는 주공
인재 소중함을 알고 禮·정성 다해야
봉황이 날아와 춤추는 태평성대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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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기산(鳳鳴岐山)'이라고 새겨진 기산의 봉황탑.


◆봉황 전설 서린 기산

봉황의 전설이 시작된 곳 중 한 군데가 중국 산시(陝西)성 바오지(寶鷄)시에 있는 기산(岐山)이다. 기산은 봉황산(鳳凰山)이라고도 한다.

기산은 중국 태평성세의 대표적 왕조이자 이상국가로 평가받는 주(周)나라의 발상지로 중국문화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나라를 만든 주역이 주공(周公)이다. 그는 고대 중국의 최고 성인인 '원성(元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주나라 문왕이 성덕(盛德)을 베풀자 봉황이 기산에 날아와 울었다고 한다. 중국 고대 시집 '시경'에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산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서 있네 저기 산 동쪽에(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하고, 역사서인 '국어(國語)'에는 "주나라가 일어나니 봉황이 기산에서 울었다(周之興也 鳳凰鳴于岐山)"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산에 가면 이런 주공과 봉황에 관련된 다양한 유적을 만날 수 있다.

2013년 8월 기산의 주공묘(周公廟), 즉 주공사당을 찾았다. 주공사당은 기산 남쪽 아래에 있다. 이곳에는 주공상을 모신 주공전(周公殿)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 희기(姬棄)와 희기의 모친 강원(姜嫄), 주공과 더불어 주나라를 세운 주역인 강태공(姜太公: 본명 姜尙)과 소공(召公) 등도 함께 기리고 있다. 본명이 희석(姬奭)인 소공은 주공과 형제 간이다. 태공전(太公殿), 후직전(后稷殿), 강원전(姜嫄殿) 등이 그 사당이다. 팔괘정(八卦亭), 윤덕천(潤德泉) 등도 있다.

윤덕천은 주공사당 옆에 있는 샘인데, 태평성대에는 물이 솟고 난세에는 물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팔괘정 천장에는 태극과 팔괘가 그려져 있다. 문왕과 주공이 완성했다는 팔괘다.

이 건물들은 당나라 때 처음 건립됐다. 당나라 초기인 618년 고조 이연의 명으로 건립된 이후 보수를 거쳐 명나라 때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사당 뒤로 기산에 올라가면 근래 건립된 건물과 시설들이 펼쳐져 있다. 주공상을 모신 원성전(元聖殿), 주공과 관련된 글을 새긴 비석과 정자, 커다란 봉황모습을 설치해 놓은 봉황탑 등이 있다. 봉황탑 몸체에는 '봉명기산(鳳鳴岐山)'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성전 뒤에는 잘 정비된 주공의 묘가 있고, 봉황이 이곳에 내려와 운 것을 기념한 표석인 '봉명강(鳳鳴岡)' 비석도 있다.

기산은 드넓은 평야에 10㎞ 정도 길게 담처럼 누워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이곳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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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에 세워져 있는 토포정(吐哺亭).

◆중국 최고 성인 주공(周公)

기원전 1000여 년 전의 사람인 주공(周公)은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보통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

주공은 공자가 평생 흠모한 대상이다. 또한 유가(儒家)에서는 고대 중국의 최고 성인인 원성(元聖)으로 추앙한 인물이다. 주공은 문왕의 넷째 아들이자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의 동생이다. 문왕은 정비(正妃)와의 사이에서 모두 열 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 가운데 주공은 가장 탁월한 능력과 비범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문왕이 강태공을 책사로 중용했던 것처럼 무왕은 동생인 주공을 책사로 중용함으로써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주공은 이처럼 주나라 창업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완성한 인물이다.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 무왕은 나라의 기틀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죽고 만다. 이때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하게 된 주공은 성실하게 그 임무를 완수, 7년 동안 주나라를 정치적으로 안정시켜 놓은 뒤 성왕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공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그는 하루에 7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국정에 임한 그의 성실함은 '일목삼악(一沐三握)'과 '일반삼토(一飯三吐)'라는 말로 상징되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머리를 감다가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붙들고 나왔으며, 또한 식사 도중에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를 찾은 사람이 먹던 밥을 내뱉고 나오는 주공을 대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누구든지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산 위에 올라가면 주공의 이런 일화를 새긴 비석과 이를 기념해 세운 정자 토포정(吐哺亭) 등이 있다.

주공은 주 왕조를 개창한 공을 인정받아 노(魯)나라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봉지(封地)로 부임하지 않고 주나라 조정에 남아 무왕을 보좌했다. 대신 아들 백금(伯禽)을 대리 부임시켰다. 주공은 부임지로 향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한 번 씻을 때 세 번 머리를 거머쥐고(一沐三握髮), 한 번 먹을 때 세 번 음식을 뱉으면서(一飯三吐哺)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며 인재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먹던 음식을 토해내며 인재를 얻다(握髮吐哺得賢士)'라는 뜻의 글귀가 생겨났다. 대통령이, 지도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다. 국민 모두의 신뢰를 얻고 박수를 받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훗날 후한(後漢) 말기 삼국시대의 조조(曹操·155~220)는 '단행가(短行歌)'에서 "산은 아무리 높아도 싫지 않고, 바다는 아무리 깊어도 싫지 않다. 주공이 먹던 밥을 뱉어내니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라고 읊었다. 여기서 '주공토포(周公吐哺)'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기산 위에 있는 원성전 들어서는 입구 패방에 이 '천하귀심(天下歸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주공전(봉황산)
기산 아래 주공사당의 주공전(周公殿). 바로 옆에 강태공상을 모신 태공전(太公殿)이 있다.

◆성군의 덕치 상징하는 봉황

봉황과 관련한 기록은 주나라 이전의 역사에도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황제(皇帝) 57년에 봉황이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백호통(白虎通)'에는 '황제시절에 봉황이 동원(東園)에 머물러 해를 가리었으며, 항상 죽실(竹實)을 먹고 오동(梧桐)에 깃들인다'라는 기록이 있다.

황제시절뿐 아니라 요순 시절에도 봉황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중국 고대에는 성군의 덕치를 증명하는 징조로 봉황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 전한시대 가의(賈誼)가 지은, 굴원의 절개를 기린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을 보고 내리고,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을 보일 때면 날개를 거듭 쳐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

조선 시대에도 봉황은 성군의 덕치를 상징했다. 그런 의미로 노래나 춤에도 쓰였다. 조선 초기에 윤회(尹淮)가 개작했다는 '봉황음(鳳凰吟)'은 조선의 문물제도를 찬미하고 왕가의 태평을 기원한 노래였다. 또한 '세종실록' 악보(樂譜)에 수록된 '봉래의(鳳來儀)'는 궁중무용으로, 궁중에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추던 춤이었다. 이 무용은 당악과 향악을 섞어서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태평성세를 찬양하는 의미로 췄다. 옛날 순임금이 태평시대를 열고 '소소(簫韶)'라는 음악을 지어 연주할 때 봉황이 와서 놀았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

지옥 같은 우크라니아 전쟁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는 등 지구촌이 태평성대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천하 모든 이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들이 나오고, 한반도를 포함한 이 지구촌 곳곳에 봉황이 내려와 노래하는 시대가 펼쳐지길 꿈꿔본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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