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17] '서선(書仙)' 소식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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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08   |  발행일 2022-04-08 제34면   |  수정 2022-04-08 08:09
北宋 4대 서예가로 명성…"내 글씨는 마치 부드러운 솜으로 강한 철을 싸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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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자신이 시를 짓고 글씨로 쓴 '황주한식시첩'(부분).

소식(蘇軾·1037~1101)은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송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이기도 하다. 황정견, 미불, 채양과 함께 북송 4대 서예가로 꼽힌다.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학자, 정치가이기도 한 그는 쓰촨성 출신으로 호가 동파(東坡)다. 소식이란 이름보다는 소동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장가로 뛰어나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린다. 세 사람 모두 당나라와 송나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어간다.

황정견은 소식의 글씨를 평하면서 "송대에 제일가는 서예가는 마땅히 소식"이라고 말했다. 금나라 서예가 조병문은 "그의 글씨는 안진경과 같아 생동감이 있으면서 운치가 뛰어나고, 법도에서 새로운 뜻이 나와 호방함 밖에서 묘한 이치가 깃들어 있으니 가히 서선(書仙)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소식은 초기에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를 배웠다. 특히 왕희지의 '난정서'에 주력했다. 중년에는 안진경 등의 좋은 점을 흡수한 뒤 다시 위진 시대의 졸박하고 두터운 풍격을 결합해 자신의 서체를 개척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굳세고 호방한 그의 글씨는 위진시대나 당나라 서체의 풍격과도 달라 '소체'라 불리기도 했다.

소식은 자신의 글씨에 대해 스스로 "마치 부드러운 솜으로 강한 철을 싸맨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의 글씨에 대해 청나라 오덕선은 "소식의 필력은 웅장하고 호방하면서도 표일한 기운이 하늘로 뻗쳐 있기 때문에 살이 찌더라도 속되지 않다"라고 평했다.

소식의 작품으로는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이 제일 유명하다.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를 짓고 직접 행서로 쓴 작품이다. 거리낌 없는 필체로 그의 품성과 기개를 잘 보여준다. 동기창은 소식의 이 작품에 대해 "내가 평생 소식의 진적 30여 권을 보았는데 이것이 단연 제일"이라고 말했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안진경의 '제질고(祭姪稿)'와 함께 '천하 3대 행서'로 꼽히기도 한다.

이 시첩에 황정견이 짓고 직접 글씨를 서 붙인 발문이 또한 유명하다. 발문의 내용 중 일부다. '동파의 시는 이태백과 흡사해 마치 이태백이 이곳에 온 듯하다. 이 글씨는 안진경, 양응식, 이건중의 필의를 겸한 것 같다. 동파의 글씨를 다시 써보지만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다음에 동파가 내 글씨를 보면 아마도 부처님이 안 계신 곳에서 높은 척을 한다고 웃을 것 같다.'

소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인 '신법(新法)'에 반대, 1071년 지방관으로 전출되어 항저우(杭州)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항저우에서 그는 서호(西湖)에 둑을 쌓아 침수를 막았는데, 지금도 '소제(蘇堤)'로 남아 서호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요리를 좋아했던 그가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주곤 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 요리가 지금까지 전해지며 사랑받고 있는 '동파육'이다.

소동파는 천성이 자유로운 예술가였으며 또한 일반 백성들을 위하고 가까이 했다. 그 후 하이난(海南)으로 유배돼 7년 동안 귀양살이 후 귀향하다 별세했다.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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