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3] 안평대군, 세종 셋째 아들이자 '조선 4대 명필가'…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 들려줘 그린 '몽유도원도' 탄생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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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07   |  발행일 2022-10-07 제34면   |  수정 2022-10-0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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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작품으로 전하는 '만리관산(萬里關山)'.

안평대군(1418~1453)은 서예, 시, 그림 모두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다. 특히 조맹부와 소식 등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서예들을 수집해서 보고 연마, 조맹부 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명필로 명나라 황제까지 감탄했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에게 달려가서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따랐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 글씨체를 따랐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궁궐에 소장된 많은 서화 진적(眞蹟)과 자신의 수장 서화를 보고 수련했던 덕분이다.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의하면, 모두 222점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이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의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은 '이용'.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 낭간거사 등으로 불렸다. 수양대군과 더불어 문무에 능했으나, 안평대군은 특히 문필과 관련한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흔히 조선의 사대 명필가를 손꼽으라면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를 이야기한다.

그는 아버지 세종의 한글 창제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판각 글씨도 원래 그의 솜씨였으나, 현존하는 해례본은 첫 장만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다시 만들어 붙인 영인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세조가 즉위한 뒤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세조에 의해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강탈당해 일본 덴리 대학에 소장 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쓴 발문과 세종대왕영릉신도비 등이 있다.

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는 그를 아끼고 후원하던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림을 그리게 했고, 발문은 자신이 직접 쓴 걸작이다.

안평대군은 시와 그림도 좋아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는데, 특히 안견의 그림을 좋아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안견 또한 자신을 알아주는 안평대군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안견은 수양대군의 야망과 음모를 꿰뚫고 안평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안평대군은 죽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안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견은 대군의 아끼는, 베이징에서 구한 용매먹을 일부러 훔친 뒤 알게 함으로써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안평대군은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그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마저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견은 죽음을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출세시킬 정도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평대군이 직접 시를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하는 '만리관산(萬里關山)' 작품이 있다. 쪽물을 들인 종이에 금니로 쓴 작품이다.

'만리 관산에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운 가을/ 누가 높은 누각에 기대어 옥피리를 부는가/ 그 소리 은하수 끝까지 퍼져가니/ 아, 저기에 내 친구가 있구나(萬里關山桂影秋 何人橫玉倚高樓 一聲吹入廣寒殿 自有知音在上頭)'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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