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2] 中 시안 비림(碑林)…2천년 문화예술의 보고(寶庫) '비석의 숲'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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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25 08:13  |  수정 2023-01-20 08:10  |  발행일 2022-11-25 제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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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碑林)' 현판이 걸린 석대효경 비정. 청말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관리 임칙서가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중국 시안(西安)은 산시(陝西)성의 성도(省都)이다. 이전에는 장안(長安)이라고 불리었으며,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천년에 걸쳐 13개 왕조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다. 진시황릉(秦始皇陵), 병마용갱(兵馬俑坑) 등 유명한 고대 문화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고대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 시안에 다른 곳에는 없는 특별한 박물관이 있다. 시안의 문묘(文墓·공자묘)에 있는 비석박물관인 비림(碑林)이다. 역대 중국의 귀중한 비석을 수집하여 모아놓았다. '비석의 숲'이라는 의미의 '비림(碑林)' 명칭에 걸맞게 수많은 비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왕희지, 저수량, 구양순, 장욱, 안진경 등 역대 서예 대가의 친필 석각을 비롯해 다양한 옛 석각예술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한나라 때의 비석부터 소장돼 있으니 2천년 세월의 자취를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는 문화예술의 보고다. 특히 서예가나 서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성소(聖所)'라 할 만하다. 비석과 묘지(墓誌) 4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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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 전시실의 고대 석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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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경의 '안씨가묘비'에 새겨진 글씨(부분).

◆1087년 탄생한 비석박물관

비림이 조성된 건 북송 철종 때 공부낭중(工部郞中)이자 시안 전운부사(轉運副使)였던 여대충(呂大忠)의 공로가 크다. 그는 당나라 말 이후 전란 탓에 방치돼 있던 '개성석경(開成石經)'과 '석대효경(石臺孝經)' 비석을 현재의 비림이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했고, 이를 계기로 역대 비석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비림의 조성 시기는 당말 오대(唐末五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장안성(長安城) 국자감 내에는 745년 당나라 현종이 서(序)와 주해(注解)를 직접 쓴 '효경'의 내용을 새긴 석대효경비 그리고 문종의 명으로 837년에 '역경' '서경' '효경' '논어' 등 12편의 중국 고전을 양면의 돌 114개에 65만여 자를 새긴 개성석경비가 있었다. 여대충은 당나라 말기(904년)에 이러한 중요 비석의 보호를 위해 비석을 문묘 내에 집중시켰으며, 북송 때인 1087년에는 개성석경 비를 보존하기 위해 석비 전문 진열건물을 건립했다. 비림이 탄생한 것이다. 1090년에는 비랑(碑廊), 비정(碑亭)을 증축했다.

이후 각 왕조의 광범위한 수집을 통해 점점 규모가 확대되었고,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비림(碑林)'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비림은 고대의 비석을 가장 많이 수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역대 유명 서예가·명인의 석비 약 3천개,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의 각종 묘지(墓誌) 1천여 개를 진열하고 있다. 이 중 당나라 비석이 가장 많이 있다. 비석들은 일곱 군데의 전시실에 나눠 보여주고 있다.


왕희지 등 역대 서예 대가 친필 석각
한나라~청나라 각종 墓誌 1천개 진열

유교 경전 돌에 새긴 '개성석경' 보관
청나라 강희제때 '맹자' 추가 13경 완성

초기 예서→해서로 변화한 서체 전시
무덤 지키는 석수·석등·수호신 인물상

당나라 현종 친필로 유명한 '석대효경'
치국 이념 삼고자 한 '효제사상' 담아



비림의 중심건물은 석대효경이 서 있는, '비림'이라 적힌 현판이 걸린 비정이다. 취푸(曲阜) 문묘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행단(杏壇)이 중심인 반면 이곳 비림은 황제가 직접 주석을 달고 글을 쓴 '석대효경'이 있는 비정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뒤편에는 유교 13개 경전을 새긴 개성석경을 보관하는 제1전시실을 비롯한 전시실이 펼쳐진다. 사당이나 강당보다는 유교 경전이 새겨진 비석을 중시했던 비림의 성격을 보여준다.

제1전시실에서는 가장 중요한 석비인 개성석경을 볼 수 있다. 유교 경전을 돌에 새겨놓은 것이다. 당나라 문종 때(837년) 전해오던 여러 유교 경전을 모아 돌에 새겨, 여러 경전의 착오를 바로잡는 표준이 되게 하였다. 청나라 강희제 때 '맹자'를 추가로 새기면서 13경이 완성되었다. 비석이 처음 새겨진 연대가 당나라 문종 때여서 그 연호인 개성(開成)을 따라 개성석경이라 부른다. 북송 때 개성석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세우면서 비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제2전시실은 당나라의 유명한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나라 때 기독교 일파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비롯해 당나라를 대표하는 명필 구양순, 저수량, 왕희지, 안진경, 이양빙 등의 글씨를 새긴 비석들이 있다.

제3전시실은 역대 서체들을 살펴볼 수 있는 비석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다. 한나라 비석 '희평석경' 잔석, '조전비' 등에서 초기 예서를 볼 수 있다. 서진의 '사마방비'는 예서에서 해서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4전시실에는 비석에 새겨진 그림인 석각도화(石刻圖畵)가 전시되어 있다. 주로 송·명·청 시기에 새겨진 것들이다.

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인 동관에는 한나라·당나라 시대 무덤을 장식하고 있던 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로 유교문화가 정착한 한나라 이후의 것들이다. 서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석관(石棺)을 비롯해 무덤을 지키는 다양한 형태의 석수(石獸), 불을 밝히는 석등(石燈), 수호신 성격의 인물상 등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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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 전시실에 있는 안진경의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왼쪽)' 와 '다보탑비(多寶塔碑)'.

◆유교 경전 최고 권위의 판본 '개성석경' '석대효경'

개성석경과 석대효경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비림 탄생의 계기가 되었을까. 개성석경은 유교의 12경, 즉 '주역' '상서' '시경'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를 새겨 놓은 비석이다. '맹자'를 보충해서 13경이 된 건 청나라 건륭 시대에 이르러서다.

개성석경은 830년 당나라 문종이 국자감 좨주 정담(鄭覃)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만들기 시작해 837년에 완성했다. 114개의 비석으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65만252자에 이른다.

당나라 시대는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때여서 과거시험과 직결된 유교 경전의 수요가 많았다. 그런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경전을 베껴 쓰는 방식이다 보니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전의 권위와 정확성을 보증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개성석경이다. 장안성 국자감 안에 세워진 개성석경은 유교 경전의 최고 권위를 지닌 판본이 됐다.

석대효경은 당나라 현종의 친필로 유명하다. 유교의 효제(孝悌) 사상을 치국 이념으로 삼고자 했던 현종은 '효경'의 서문과 주석까지 직접 써서 석대효경에 담았다. 제1전시실 앞에 자리한 비정이 바로 석대효경이 있는 효경정(孝經亭)이다. 석대효경의 높이는 6m가 넘는다. 높이가 620㎝, 너비는 120㎝. '효경'을 새긴 이 비석은 3층으로 이뤄진 돌 밑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석대효경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윗부분에는 당 현종이 지정한 제목을 태자가 전서체로 썼다. 본문은 예서체다. '효경'은 효의 원칙과 규범을 수록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흥미로운 사연을 담고 있다.

당 태종 때(635년)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이 장안에 도착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시켜 그들을 영접하고, 3년 뒤에는 네스토리우스교 교회당인 대진사(大秦寺)가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네스토리우스교는 중국에 착실히 뿌리를 내려갔다. 781년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졌다. '대진'은 로마, '경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불일치를 주장한 네스토리우스가 창시한 종교다.

이 비의 앞부분은 천지창조, 사탄에 의한 인간의 타락, 예수의 탄생, 예수에 의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서 경교가 중국에 들어와 유행하게 된 상황과 중국 황제들에 대한 칭송이 서술돼 있다. 한동안 유행했던 경교는 845년 무종이 불교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등 폐불(廢佛) 정책을 단행하면서 불교뿐만 아니라 경교 역시 큰 타격을 입고 사라지게 된다.

경교와 더불어 이 경교비가 자취를 감춘 지 78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농부들이 경교비를 발굴하게 된다. 1623년의 일이다. 비석에 관한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고와 알바로 세메도를 비롯해 서양의 많은 선교사가 비문을 탁본하고 번역해 본국으로 보냈다. 라틴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이탈리아어·영어 등으로 번역된 경교비는 유럽 각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경교비에 다시 시련이 닥친다. 급기야 서양인 사이에서 비석을 유럽으로 옮겨서 보관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됐다. 덴마크인 프리츠 홀름은 실제로 경교비를 서구세계로 가져가고자 시도했다. 1907년 5월에 시안을 찾은 그는 금승사 주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인부를 고용해 경교비와 완전히 똑같은 복제본을 만든다. 홀름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시안 순무(巡撫) 조홍훈(曹鴻勛)은 경교비를 비림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해서 1907년 10월, 경교비가 최종적으로 비림에 자리 잡게 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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