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6] 송설도인 조맹부…조선의 왕도 추종한 송설체…많은 선비와 관리들에게 유행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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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30 08:08  |  수정 2022-12-30 08:34  |  발행일 2022-12-30 제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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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부 글씨 '한거부(閑居賦)'.

조맹부(1254~1322)는 중국 원나라 시대의 최고 서예가다. 그의 서예작품은 멋지고 빼어나기에 많은 사람이 아주 좋아했다. 원나라 시대의 서예가 대부분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서예 글씨를 배우던 자세는 대단했다. 그는 하루에 1만자를 쓰고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의 오른쪽 소매는 늘 닳아 해졌다고 한다. 그만큼 부지런히 글씨를 썼던 것이다.

그는 글씨만 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림도 뛰어났고, 시도 잘 썼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에도 넓은 지식을 가진 당대의 대표적인 교양인이었다.

서예에서는 당나라의 안진경 이후 송나라에서 성행했던 서풍을 배격하고, 왕희지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그림에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고, 당·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글씨는 해서·행서·초서 모두 품격이 높았다.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명나라 사람 고대(高岱)는 조맹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원나라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많으나 유독 조맹부가 가장 뛰어났다. 당나라 초의 여러 명가에서부터 양송(兩宋)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 근골은 고운 아름다움에 숨기고, 풍요로운 정신은 굳센 것을 표준으로 하며, 팔을 움직여 전화(轉化)하는 곳은 마치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날리고 탄환이 손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숙련의 지극함에 이르러 비로소 영화로움을 드러냈다."

조맹부가 이런 성취를 이룬 것은 그가 항상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덕분이었다. 해진은 그가 글씨를 공부할 때 '10년 동안 누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도종의는 그가 '하루에 가히 1만자를 썼다'고 했다.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紀)' '한거부(閑居賦)' '낙신부(洛神賦)' '귀거래사(歸去來辭)'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조맹부의 글씨체를 송설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송설체가 오랫동안 유행했다. 고려 말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지은 만권당(萬卷堂)을 중심으로 양국 학자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조맹부의 송설체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특히 행촌(杏村) 이암은 송설체의 정수를 터득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다. 전아하고 유려한 귀족적 풍모를 지닌 송설체는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자 송설체는 점차 확산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말선초에 활약한 권근, 최흥효, 신장 등의 글씨에서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세종 연간에 이르면 송설체는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문종, 안평대군,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 많은 서예가가 나타났다. 그중 안평대군이 단연 으뜸이었다.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구해가곤 하며 중국에 전해져, 당대 제일의 글씨로 극찬을 받았다. 송설체는 강희안, 서거정, 강희맹 등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성종 연간에 이르러 송설체는 더욱 확산, 조선 제일의 서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욱이 성종은 학예진흥에 힘쓰며 송설체를 추종하여 문종과 함께 조선 초를 대표하는 어필(御筆)이 되었다. 그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처럼 왕들이 한 서체를 추종하자 많은 선비와 관리들도 따라 쓰게 되었다. 송설체의 유행은 불경 사경이나 왕의 교지 등 고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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