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본 근세사에서 기억해야 할 토지등록대장 검지장(檢地帳) 이야기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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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4 11:04  |  수정 2023-06-14 11:08  |  발행일 2023-06-14
일본 쥬니치신문 최근 검지장 조사보고서 소개
카시와하라지 지역에 게이초건지 등 총 14권 건지서 남아 있어
정권 수입확보 위한 중요수단
사람과 토지 변천 등 새로운 시각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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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건우 계명대 명예교수

최근 일본 나고야에서 발행되는 쥬니치(中日)신문의 2023년 5월19일자(https://www.chunichi.co.jp/article/692434)에는 토요토미와 도쿠가와 정권에서 토지조사 결과에 관한 마이바라(米原)시 교육위원회에서 발행한 검지장(檢地帳) 조사보고서를 소개한 바 있다. 최근 관련 자료를 입수해 일본 근세사에서 토지등록의 역사, 이른바 검지장에 관한 내용을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일본근세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즈치모모야먀(安土桃山)시대,이른바 쇼쿠호우(織豊)시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부터 시작되는 에도(江戶)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는 불교탄압과 상업도시 건설을 추진한 오다 노부나가 이후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조선 침략으로 멸망하는 계기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뒤이어 에도막부로 일본을 이끈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에 검지장이 전국규모로 실시되었고 관련 자료가 다양한 지역에서 발표된 바 있다. 검지장 조사보고서가 발간된 마이바라시 카시와바라(柏原) 지역은 제주도와 비슷한 크기의 시가현 비와꼬(琵琶湖) 인근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와꼬 지역은 토착의 오우미(近江)상인 등의 역할로 농수산업과 상업이 크게 발전한 바 있다.

일본 근세사에서 농민들이 공물을 내지 못해 다른 영지로 도망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농민들의 공납을 재정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동 시대 영주들에게는 이들을 복원하는 대책을 강구하였다고 하지만 비와꼬에 위치한 시가(滋賀)현 히코네(彦根) 등의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병참 역할을 수행할 만큼 전쟁 수행에 중요한 지역이었다고한다. 임진왜란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포함한 영주가 보유한 미곡 생산량 이른바 코쿠다카(石高)에 비례하여 병력(보조원 포함) 25~30만명이 동원되었고 당시 일본 총병력의 약 반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검지장 조사보고서를 발간한 시가현 마이바라시 교육위원회는 카시와바라 지역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로 실시한 '덴쇼검지(天正?地)'(1591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실시된 '게이초검지(慶長檢地)'(1602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검지 방식이 확립된 '엔포검지(延寶檢地)'(1679년) 등 세 차례의 검지 결과를 기록한 총 14권의 검지서가 남아있으며 각각의 검지장에는 논밭 면적과 등급, 코쿠다카(石高)라는 예상 미곡 생산량, 경작자 이름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분석한 연구진은 검지는 당시 정권의 수입확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량단위를 만들었고 현대 생활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십진법도 없던 시기에 착오로 계산된 부분을 고려하더라도 나름대로 잘 정리하였다고 한다. 카시와바라 지역에 관한 남아 있는 검지장을 거듭 정리하면서 그간 기록된 데이터를 분석하여 사람과 토지의 변천 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 발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일본 근세사시대 검지장 보고서가 갖는 근세사적 의미는 당시 조선 후기 양안(量案)이란 토지등록제가 있었으나 일본과 비교해 전국적이거나 지속적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일본의 토지등록 검지장은 당시 국력면에서 임진왜란 등 대내외 전쟁수행비용으로 악용되거나 공납 수입확보 수단 등으로 그 활용 효과가 대단히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류건우<계명대 명예교수·전 일본 시가대 경제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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