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오의 한국현재사] 1919년 3월8일, 대구 서문시장

  •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 |
  • 입력 2024-03-08 06:58  |  수정 2024-03-08 06:59  |  발행일 2024-03-08 제26면
105년 전 서문시장에서의
만세운동 실패로 끝났지만
뜨거운 함성 경북지역 확산
3·1운동 서울서만 했다면
중요한 날 평가 못받았을것

2024030701000233000009231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1919년 3월1일에 서울 등 전국 6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3·1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운동은 단지 그날 하루로 끝난 것이 아니었고, 몇 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어요.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지역에 따라 시간이 필요했어요. 서울의 학교에는 3월10일에 휴교령이 내려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귀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가서 각자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지요. 유관순 열사도 그중 한 학생으로, 4월1일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그보다 앞선 3월8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어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대구 출신 이갑성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이만집 목사를 비롯한 YMCA, 계성학교, 신명여학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였어요. 그들은 대구고보 학생들까지 연결하여 대구 읍민이 참여하는 만세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3월8일에 주동자들은 장꾼들 틈에 서문시장으로 들어가 기다렸고, 계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가장 먼저 도착했어요. 대구고보 학생들도 경찰의 눈을 피해 서문시장으로 합류했습니다. 마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시장에 몰려든 장꾼들이 가세하여 더욱 맹렬해졌지요. 그들은 공약 3장을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쳤습니다. 이날 시위로 모두 157명이 구속되었고, 그중 6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어요. 특히 이만집 목사는 민족대표 33인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형인 징역 3년이 언도되었습니다. 비록 대구에서의 3·8 만세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만세의 함성은 경북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5월7일 청도까지, 경북 거의 전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모두 2천133명이 체포되었어요.

대구에서는 이때 여성들도 신명여학교 교사 및 학생 30여 명이 체포되었다가 16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경북 도내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체포되었던 곳은 영덕이었는데요. 특히 3월19일 만세시위로 남편들이 구속되자 24일에 다시 시위를 주동해서 부부가 함께 감옥생활을 했던 신분금과 윤악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4월13일에 영천의 기독교인 김정희는 흰색 명주에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를 써서 혼자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당시 고등계 경찰보로 근무하던 동생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대구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계속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시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비폭력 만세운동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요. 유생과 농민 등을 중심으로, 식민지배로 전락하기 이전에 의병전쟁을 벌였던 전통이 합세하면서 점차로 폭력투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주재소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형태도 나타났지요.

만약에 3·1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끝났고 말았다면, 오늘날 이렇게 중요한 날로 평가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때 참가했던 청년학생들은 독립운동의 핵심인물로 성장했어요. 105년 전 오늘, 서문시장에서의 그 뜨거운 함성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