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진상은 자기가 진상인지 모른다

  • 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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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18 07:05  |  수정 2024-03-18 07:06  |  발행일 2024-03-18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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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변호사

'진상'은 본래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특산물을 윗사람에게 바치는 행위'를 의미했으나,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 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즘 '진상'은 이 말의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진상 떨다'라는 말은 '유독 까탈스럽게 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세상 어디에나 진상은 있고, 진상은 자신이 진상인지 모르고, 진상이 아닌 사람은 괜히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진상짓을 했나 하고 반성한다.

유난히 타인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국선전담변호사라서 국선사건만 한다. 나의 고객들 중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고 의심이 많아서 처음부터 따지듯 대하는 사람, 화가 많으신 분도 있고, 성실한 변론을 압박하시는 분도 있다. 특히 성실변론압박 유형 중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개가 행인을 물어서 상해를 입게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피고인은 내게 자신의 개는 결코 사람을 물지 않았다면서, 개를 목숨처럼 사랑하지만 사람을 무는 개는 키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재판에서 지면, 저는 바둑이(가명)를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내가 생명을 방생해서 덕을 쌓아도 모자랄 판국에 변론을 대강해서 실체적 진실이 묻히고 그것 때문에 바둑이가 죽는다면….' 나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서 한동안 시름시름 했고 동네에서 산책하는 개만 봐도 마음이 무거웠었다.

예전에 내 재판을 기다리면서 방청하는데, 어떤 사람이 위험한 물건을 들고 다른 사람을 때려서 '특수상해죄'라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 사람은 법정에서 '특수'를 죄명에서 빼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검사님은 공소장을 변경할 계획이 없다고 하시고 판사님은 공소장을 강제로 변경시킬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이 계속 판사님께 시비조로 말했다. 언성을 높이며 따지는 피고인에게 판사님은 판단해 보고 피고인 주장대로 위험한 물건을 들고 하지 않았으면 그 부분은 무죄가 되는 것이지, 판사가 검사에게 죄명을 바꾸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고 차분히 설명하셨다.

이 사람은 조르다 안 되니까 화를 내며 "아, 솔직히 사람 싸다구 때리는 게 죕니까? 네?"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가슴 속에서 삼선 슬리퍼를 꺼내어 파파팟 까치발로 바닥을 짚고 공중부양해서 피고인석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슬로 모션으로 슬리퍼를 든 손을 위로 치켜올렸다가 그 난동남의 오른쪽 뺨에 쫘악 날리고. "싸다구 때리는 게 죄가 아니라며"라고 말하며 착지한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하며 품위를 잃지 않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선고기일을 정해서 그에게 알려주니 그는 욕설을 하면서 반말로 "안 나와"라고 했다.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코브라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은 욕설을 섞어 투덜거리다 나갔다. 재판장님은 피고인을 감치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재판이 많아서 방청석에 다들 지연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욕설에 방청석도 쇼크가 가시지 않았는데, 재판장님이 몇 초 정도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재판을 차분하게 이어나가셨다. 살아있는 부처 수준의 대처와 그 이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온화한 재판 진행에 놀랐다. 법정을 나오면서 나만 사바세계에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스크리트어로 '사바'란 견디다, 감내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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