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초원의 빛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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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03 08:00  |  수정 2024-05-17 08:19  |  발행일 2024-05-03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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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1913년 5월3일 미국 극작가 윌리엄 인지가 태어났다. '사랑하는 시바여, 돌아오라' '피크닉' '버스 정류장' 등 그의 극작들은 영화로서도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윌리엄 인지의 작품들은 이루지 못한 남녀 사이에 관심이 많다. 그만큼 대중문학적 요소가 강하다. '초원의 빛' 역시 첫사랑은 맺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에 서사의 바탕을 두고 있어 흥행에 성공할 기본을 갖추었다.

미남 고교생 버드와 청순한 여고생 디니는 첫사랑의 연인이 된다. 버드는 디니와 육체관계를 원한다.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디니는 버드의 바람을 거부한다.

부잣집 아들인 데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버드는 디니를 멀리하고 뭇 여학생들과 어울린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디니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대공황 국면에 버드의 집이 파산하고, 버드의 아버지가 충격으로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마을로 이주한 버드는 세월이 흐른 뒤 결혼해 아빠가 된다.

디니도 퇴원해 결혼한다. 그 후 디니는 친구들과 함께 버드가 사는 농장을 방문하게 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과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되, 앞으로는 우정을 나누자고 이야기한다.

결말을 장식하는 디니의 결정에 과연 지지할 만한 타당성이 있는지 헤아려 본다. 2024년 5월 현재 세계 최고령자로 인정된 마리아 브라냐스 모레라 할머니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마리아 할머니는 일곱 가지 장수 비결을 말한다. 그중 정서적 안정, 평정심 유지, 걱정이나 후회 않기, 자연과의 접촉 등은 많이 들어본 항목들이다. 그런데 "해로운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내기"는 색다르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디니에게 버드는 그저 해로운 존재였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에는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묵가의 표현을 빌리면 "겸애(兼愛)" 사상이 전혀 없는 저급한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보는 안목이 모자라는 어린 시절의 디니는 버드를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낼 생각을 하면 잘못이다. '삼국지연의'의 유비는 여포를 평가하면서 "한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초원의 집'은 극본이고 영화일 뿐이다. 허구와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대중은 선량한 배역을 맡은 연기자를 실제로도 착한 사람으로 오인하며 추종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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