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자존심 강한 北의 코털 쓸데없이 건드려 안보 위태롭게 했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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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6-01   |  발행일 2012-06-01 제37면   |  수정 2012-06-01
전·현직 대통령을 말하다 - 박철언 전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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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박철언 전 장관이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대구경북발전포럼’ 사무실 벽에 걸린 대형 백두산천지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박철언, 통일·권력·돈·여자 그리고 영화 ‘코리아’를 말하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일수록 명과 암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박철언 전 장관.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와 중국 등 북방수교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권력과 돈에 관련된 구설수도 따라다녔다.

그는 ‘6공의 황태자’라고 불릴 만큼 5·6공화국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누구보다 권력의 무상함을 쓰라리게 경험했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현재 병중에 있다. 그와 대척점에 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권좌에서 물러났다. 한때 정치적 동반자였다 그를 떠난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도 야인이 됐고, 그를 감옥에 보내 주목을 받았던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4·11총선에 낙선해 정계은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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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10월 청와대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오찬에 앞서 악수하고 있는 박철언 당시 정무장관. 연합뉴스
최근 영화 ‘코리아’가 흥행을 하면서 당시 남북탁구단일팀을 막후에서 성사시켰던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통일의 꽃’ 임수경(민주통합당 국회의원·5월4일자 영남일보 위클리포유 와이드 인터뷰)에 대한 생각도 궁금했다. 박 전 의원은 1989년 6월30일,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던 평양 능라도경기장에 임 의원과 같이 있었다. 당시 임 의원은 밀입북한 대학생이었고, 박 전 장관은 비밀 대북특사였다.

마침 지난달 24일 임 의원은 대구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를 마치고 지인과 영화 ‘코리아’를 감상한 뒤 기자와 만나 ‘영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연히도 이튿날 기자는 박 전 장관과 ‘와이드 인터뷰’약속이 돼 있었다. 한 명은 진보, 다른 한 명은 보수지만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과 열정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둘 다 사선을 뚫고 방북했고 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박 전 장관은 스스로를 ‘원칙적 이상주의자’라고 불렀다. 그의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는 자신의 역사관과 삶의 궤적이 잘 나타나 있다. 기자는 한때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그의 책을 완독하고 인터뷰에 임했다.

그의 눈매와 얼굴은 고구려전사처럼 전형적인 북방계다. 곡선보다는 직선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성정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따뜻한 감성을 지녔고, 선친은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고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어머니(97세)에 대한 사모의 정을 자주 드러냈다.


◇ 이명박
대북정책은 유연하고 안보는 완벽해야 하는데 거꾸로 했다

◇ 전두환
아웅산 테러 당하고도 北과 대화는 계속했다

◇ 김영삼
3천억 받고 집권하고도 사경의 노태우 전 대통령 문병 한 번 오지 않아

◇ 김대중
대북·통일 정책에 있어 일치하는 점 많았다

◇ 그 외 정치인
홍준표 권력지향 검사지 모래시계 검사 아니야…
김부겸은 기대해 볼만

◇ 영화 ‘코리아’
91년 남북단일팀 위해 北과 수없이 비밀접촉…
현정화-리분희 재회를 통일부가 막았다고? 당연히 만나게 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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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사상 최초로 구성된 남북단일팀을 격려하고 있는 박철언 당시 체육부장관. 네덜란드 전에서 승리한 리분희(오른쪽)·현정화 선수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91년 일본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남북탁구단일팀으로 출전해 우승한 사건을 영화로 다룬 ‘코리아’가 최근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이었다. 영화를 봤는가.

“봤다. 남북단일팀 우승의 기쁨과 환희를 잘 묘사했더라. 북한팀 탁구대표 감독으로 열연한 배우 김응수씨에게 전화를 해 연기를 잘 했다고 격려도 했다.”

-모종의 역할이 있었을 것 같은데.

“85년 7월부터 91년 말까지 6년여간 42차례나 남북비밀접촉을 하면서 통일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91년 2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체육회담 때 분단 46년 만에 처음으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코리아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물론 단일팀 구성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북측대표와 수차례 협상을 가졌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장웅 북측단장과 나란히 앉아서 단일팀을 응원했다. 영화를 보니 그날의 감격이 떠오르더라.”

-영화 ‘코리아’의 개봉에 앞서 현정화(마사회 탁구감독)와 리분희(조선장애인체육협회 서기장)가 19년 만에 베이징에서 재회를 시도하다 통일부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한다. 임수경 의원이 2012년 런던올림픽 때라도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던데.

“당연히 만날 수 있어야 한다.(그는 이 사실을 따로 메모했다) 핑퐁사랑으로 유명한 안재형·자오즈민 부부도 이념의 벽에 가로막혀 헤어질 뻔 했으나 현정화 감독(박 전 장관 부인인 현경자씨와 사촌지간이다)이 간절히 요청해와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외교적 노력을 했다. 처제(현정화)는 감성적이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6공화국 이후 그간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조성, 금강산관광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었지만 현 정부 들어 다시 한반도에 신냉전이 형성되고 있다. 북방외교의 초안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명박 정부는 통일정책의 첫 단추부터 잘 못 꿰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하면 10년 안에 국민소득 3천달러가 되도록 지원한다는 보수결집용 정치구호 ‘비핵, 개방, 3000’은 ‘개방’이란 용어를 빼고 ‘비핵 남북공동번영’으로 해야 했다. 또 북한의 급격한 붕괴에 대비해 ‘통일세’를 준비하자고 했는데, ‘붕괴’라는 말도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주체성과 자존심 강한 북한의 코털을 건드려봤자 득이 될 게 없다.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쓸데없는 발언을 왜 하나. 안보는 완벽하게 해야 하고, 대북정책은 유연해야 하는데 안보는 허술하기 짝이 없고, 대북정책은 강경하다. 거꾸로 됐다.”

-북한이 붕괴되면 흡수통일이 되는 건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와 지금의 국제정세가 많이 다르다. 북한이 급격히 붕괴되면 친중국 군부강경파가 주도하는 정권이 들어서든지 중국의 허수아비정권이 북한에 세워질 게 뻔하다. 중국이 북한에 투자한 지하자원과 항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군이 북한에 영원히 진주할 명분을 주게 돼 오히려 통일이 멀어질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83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북한의 아웅산 테러사건도 있었지만 북측과의 대화는 계속했다. 맏형 같은 대승적 입장에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계속돼야 한다.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과의 외교를 더 강화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 즉 G2체제로 가고 있는데 정부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잘 못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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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한-중 탁구커플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전통혼례 때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는 박철언. 연합뉴스

-질문을 사생활로 돌리겠다. 본인과 모 대학 여교수 사이에 돈과 관련한 분쟁은 어떻게 됐나.

“여교수는 내가 관여하던 21세기한일문화포럼의 이사로 있었다. 한국복지통일연구소 기금과 관련해 은행심부름을 했는데 모 은행간부와 짜고 은행통장을 위·변조해 법원의 심판을 받았다. 사필귀정이다. 이 과정에서 추측성 언론보도로 사건이 흥미위주로 확대 재생산됐다.”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싶은 권력·돈·사랑을 마음껏 해 본 것 같다.

“권력은 강하고 긴 것 같지만 사실 약하고 짧다. 돈이란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한 욕심을 부리면 돈의 노예가 된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 섹스가 필요하지만 육체만 탐닉하면 추하게 된다.”(질문이 많으니까 빨리 진행하자고 했다)

-검사시절 ‘남민전 사건’ 등 공안검사로서 이름을 떨쳤다는데 사실인가.

“70년대말 당시 법무부 검찰국 검사, 유학, 서울지검 공안부검사는 검찰의 엘리트코스였다. 미국유학을 갔다 와서 공안부 검사로 발령이 났다. 공무원으로서 업무를 수행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긴급조치 같이 인권을 유린했던 법이 있었으나 공안부 말석검사로서 내가 관여한 사건에 있어서 억울하게 피의자의 인권을 유린한 적은 결코 없다.”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을 두 권이나 출간했다. 문학상도 여러 번 수상한 걸로 안다. 예술과 문학에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나. 문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고교시절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당시 ‘청맥’이라는 문학 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했다. 사진도 좋아했다. 정치를 그만둔 지금까지도 늘 문학과 가까이 지낸다. 지난해까지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로 5년간 봉직하면서 문학관련 강의를 했다. 작가에게 문학이란 그 시대, 그 상황에 살아가는 영혼의 절규를 담은 것이다. 깨끗한 영혼과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

-권불십년은 옛말이고 요즘은 권불오년이다. 본인의 인생에서 비껴갈 수 없는 세 사람, YS·강재섭·홍준표를 어떻게 생각하나.

“바람에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할 수 없다.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모든 사람은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YS는 나에게 정치보복을 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시인이 됐다. 자서전에도 밝혔듯 YS는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3천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받고 대통령까지 됐으나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병중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도 문병 한번 오지 않고 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을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아 안타깝게 생각한다. 강재섭 전 대표는 92년 민자당 탈당 때 약속을 위반해 가슴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가 어렸고 신권력의 회유도 엄청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10년전 그가 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지금은 모임도 같이 하는 등 잘 지내고 있다. 홍준표 전 대표는 ‘소신검사’ ‘모래시계 검사’로 잘 못 알려져 있다. 노태우 정부 때 나를 잡아넣었으면 그런 닉네임을 얻을 만하다. 하지만 YS정권이 등장하자마자 신권력을 등에 업고 칼을 휘두른 전형적인 권력지향적 검사였을 뿐이다. YS로부터 정치보복을 당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중 아내가 보궐선거에 당선됐고, 96년 총선 때도 야당으로 당선돼 국민으로부터도 복권됐다.”

-97년 대선 당시 DJP연합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원했으나 그게 부메랑이 돼 2000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후회는 없나. 또한 영·호남 지역감정은 지금도 그대로다.

“YS정권은 IMF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당연히 책임정치상 정권교체가 돼야 했다. 내각책임제가 소신이었으나 JP보다 DJ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높았다. DJ와는 대북·통일정책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방송에서,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DJ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다 일부 대구시민에게 때로는 민망한 욕설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영·호남지역감정 같은 내부의 분단을 극복해야 통일도 가능하다는 게 소신이다. 동·서화합, 보수·진보의 공생을 위해 노력했다.”

-본인의 지역구였던 대구 수성갑이 지난번 총선 때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선된 이한구와 낙선한 김부겸은 어떤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나.

“이한구 의원은 학력이나 경력으로 봐서 상당히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평가를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김부겸 의원은 굉장히 겸손했다.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역동적 통합능력이 있는, 기대해 볼 만한 후배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자살과 왕따가 문제다.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으로서 조언하고 싶다면.

“재임시절 청소년기본법을 제정하고 전국에 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하는 등 청소년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정부와 교육청은 청소년에게 ‘하지마라’는 말 대신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대구시와 대구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보수적·폐쇄적·독불장군식 생각을 버리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팔공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복원 및 기념관을 건립했으면 한다.”

-좌우명은 무엇인가. 또 추천하고 싶은 책은.

“좌우명은 ‘신의와 성실’이다. ‘천둥치는 벌판에서도 두려워말고 소신에 따라 의연하게 걸어가라’는 선친의 말씀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와 내가 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추천하고 싶다.”

 

◆ 박철언은

-1942년 성주 출생

-대구초등·경북중·경북고 졸업(41회)

-65년 서울대 법과대학(수석졸업)·서울대 사법대학원(법학석사)

-67년 사법시험(8회) 합격

-76~77년:미국 조지워싱턴법과대학원 및 조지타운대 수학

-90년 한양대 법학박사

-80년 서울지검 특수부장검사

-86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검사장)

-85~91년 북방정책·통일정책 수행을 위해 수십차례 소련·중국·헝가리·체코· 베트남 등 미수교국 비밀출장. 42차례의 남북고위급 비밀회담 남측 수석대표. 통일밀사로 21차례 방북

-89~91년 정무장관·체육청소년부 장관

-13·14·15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갑)

-시인(95년 신인문학상수상)

-변호사

-<사>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현)

-저서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 ‘4077, 면회왔습니다’ ‘獄中에서 토해내는 恨’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2’ ‘작은 등불 하나(시집)’ ‘따뜻한 동행을 위한 기도(시집)’ 등 다수


글·사진=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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