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턴연수 가서 월 500만원 일자리 잡다 - 계명대 박범진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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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1-18   |  발행일 2013-01-18 제37면   |  수정 2013-01-18
“세상은 스펙 위주로 평가하지만 내가 믿는 최고 스펙은 ‘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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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이게 신념과 용기로 진화하기 위해선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안목이라는 게 학교의 교과서에서만 나온다면 ‘청년백수’라는 이물질이 생길 리 만무하다. 우리나라 상당수 대학생은 인생대박 심리가 박혀 있다. 대박이 있다고 믿고 자신을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허세(虛勢)’란 질병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 허세가 소비욕까지 동반할 경우 삶을 흑백논리로 해석한다거나 일시에 자기 삶의 파워를 꺼버리기도 한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비관적 처세에 갇혀 있으면 결국 자신의 입에 저절로 익은 감이 안 떨어지니깐, 그런 세상하고는 대화하지도 말자며 잠수를 타 버린다. 모르긴 해도 우리 주위엔 그런 젊은 백수가 수두룩한 것 같다.

지난주 ‘나는 될 놈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란 배수진 구호를 들고 미국으로 들어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적진에서 직접 발품 팔아 외국인 유학생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자리를 찾아 월 500만원을 벌다가 귀국한 계명대 관광경영학과 4학년 박범진씨(27)를 만났다. 어차피 세상은 이론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믿을 건 현지 경험이고, 내가 겪은 것만이 내 재산이란 믿음을 갖는다. 좌충우돌 미국유학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청년백수 시대에 ‘청년기상이 뭔가’를 외쳐댔다. 미대사관에서도 그의 삶의 방식을 인정해 지원금까지 주었다.

그가 믿는 최고의 스펙은 ‘발품’이었다.


“대학생이면 부모로부터
경제 독립하는 게 도리”
할 수 있는 알바 다 하며
학비·생활비 충당해

 

호주로 가 청소·설거지
냉소와 굶주림 속에서
1년만에 1500만원 벌어
다시 ‘미국인턴’ 도전

 

뉴욕선 쪽방에서 생활
통계청 조사원 응시하려
10번이나 찾아가 설득
누구도 못한 자격증 따

 

“청년백수는 세계적 현상

안 부딪치면 기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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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면서 부모와 의절하듯 완전독립을 선언한 박범진씨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번 돈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삶의 의지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지를 실험해보고 돌아왔다. ‘나는 될 놈이다’라고 적은 문구를 자신있게 보여주며 1인 시위하듯 서있는 그의 자신감에서 한국 청년백수의 청신호를 엿본다.
◆ 고교시절 삭발로 배수진 쳤다

중학교 시절, 박범진은 없다. 너무 평범했고 공부도 어중간했다. 누구도 그를 기억할 수 없었다. 경신고에 들어가면서 표변한다.

“나는 유달리 TV에 방영된 성공시대를 탐독하듯 시청했다. 정주영 등 거장급 CEO 뒤엔 항상 ‘자수성가’란 말이 따라다녔다. 나도 참 가난했다. 그룹 창업자도 어릴 때 가난했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했다. 그럼 나도 충분히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일단 튀어야 산다고 믿고 삭발하고 입학했다.

“망가진 중학교 시절을 복원하기 위해선 배수진이 필요했다. 그 1탄이 삭발이다. 공부의 신에 빙의가 된 것 같다. 노는 시간 잡담도 아까웠다.”

곧바로 ‘묵언(默言)’을 실천한다. 삭발에 이은 두 번째 카드였다. 보름 동안 한 마디도 안 했다. 가족은 물론 선생님이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일부 곡해한 교사는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지만 다들 재밌는 애로 인정해줬다. 그것도 그의 복(福)이다. 하지만 중학교 때 워낙 기초가 약해 쉬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고3 때는 딱 6시간만 잤다.

◆ 대학 들어가면서 집과 담을 쌓는다

“대학은 세상에 공부 말고도 할 게 무진장하다는 걸 알려주는 곳이더라.”

하지만 부모가 그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 줄 수가 없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안 좋았다. 그는 부모한테 손을 내미는 걸 또 다른 ‘패륜(悖倫)’이라고 여겼다.

“대학생이란 부모로부터 언제까지 경제적 도움을 받을 것인가를 깊게 고민해야 된다. 상당수 학생은 부모를 무조건 금전지원해 주는 존재로 이용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즉각 집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다. 거의 의절에 가까운 결심이었다. 고교 때 튀는 기질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미 대학에선 유별스러운 구석이 있는 스마트한 친구로 소문이 나 있었다. 1학년인데 4학년 수업에서 톱성적을 받는다. 영어회화도 상위급이어서 교내 외국어 기숙사에도 들어가서 2년간 산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선 일단 내 힘으로 돈을 벌어야 된다고 믿었다.”

21세 박범진은 고립무원의 사지(死地)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학비는 물론 용돈과 생활비 전액을 부모한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호주머니엔 여윳돈이 전혀 없었다. 빈털터리로 노숙인처럼 딱한 처지가 된다. 일단 기숙사에서 살고, 필요한 돈은 오직 아르바이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 그는 대한민국 대학생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알바를 해본다.

“‘젊어 고생은 돈 주고도 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늬만 대학생일 뿐 일상은 거의 생활보호대상자 수준이었다. 돈 걱정 안하는 또래들이 너무 부럽고 시기스럽기도 했다. 같은 20대이지만 난 쿨하지도 펀하게 놀 수도 없었다. 캠퍼스에도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엄존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비애스러웠다.”

독한 유전자를 가졌다. 돈이 없어 며칠 밥을 못 먹기도 했다. 부모에게 전화 한통 안했다. 막일에 매달리면서 연명을 위한 돈 벌기 계획을 세웠는데 이게 ‘바위에 계란 치기 식’으로 보였다. 이왕 돈을 벌거라면 큰물로 가자고 결심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감행한다.

◆ 호주에서 노예의 심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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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진씨가 지난해 11월 출간해 벌써 2쇄에 들어간 좌충우돌 미국 유학기 ‘거북, 발품 팔아 뉴욕 가다’.
50만원 들고 호주 멜버른으로 갔다. 한인 청소용역업체를 노크한다. 3개월 정도 있었다. 시급 1만3천여원.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7시까지 궂은 청소일을 했다. 최소 생활비 명목으로 월 70만원만 떼놓고 나머지는 다 저금을 했다. 툭 하면 라면이었다. 하루 한 끼에도 만족해야만 했다. 오직 일뿐이었다. 여행은 그와 별개의 세상이었다.

“육체적 고통은 참겠는데 본국인들은 물론 가끔 한인들까지도 냉소적 시선을 보냈을 때 욱하는 맘이 자주 들었다.”

사막지역에 있는 5성급 리조트로 옮긴다. 식당 설거지 멤버가 된다.

“겉으로는 천국이었지만 주방 뒤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돈은 좀 더 받았지만 일이 주는 스트레스는 동일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는 그에게 몫돈을 안겨준다. 1년 있다가 1천500여만원을 들고 귀국한다. 그의 삶의 지침도 조금 수정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돈따라 살지는 말자고 다그쳤다.”

◆ 미국 뉴욕에서 더 큰 사고를 쳐보자

귀국해 계명대 인턴사업부 계약직 직원이 된다. 재학생을 해외로 보내는 일이다. 뭔가 필이 꽂혔다. 일단 미국으로 잠행하기 위해선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그런데 교육과학기술부 주최의 해외인턴연수프로그램인 ‘WEST(Work·English·Study·Travel)가 그에겐 수호천사처럼 보였다. 총 18개월의 취업비자 중 5개월의 어학연수, 12개월의 인턴십, 1개월의 여행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욕심이 났다. 호주는 노동 뿐이었는데, 미국으로 가면 노동이 아니라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화교류가 목적인 J1비자를 받아야 했지만 정작 문제가 된 건 1천여만원의 제반경비였다. 어학연수비용 500만원, 스폰서 관련 비용 등이었다. 물론 현지에 간다고 해도 소소한 생활비는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일단 응모를 해서 합격했지만, 미국 가는 비용까지 정부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간절한 메시지를 관련 사이트에 올린다.

“오 마이 갓(Oh my god)!”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사실이었다. 정부로부터 1천만원의 지원금이 장학금 형태로 주어졌다. 2009년 8월, JFK공항에 도착한다.

“뉴욕에서 잠잘 집을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는 것이나 진배없다. 유학생 대다수는 이 대목에서 절망하고 또 삶이 뭔가를 배운다. 내공이 약하면 부모 곁으로 금세 떠난다. 난 대한민국 하이에나였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엄청난 보증금에 월 200만원 내는 호화 전세집에서 사는 유학생도 있지만 난 그런 곳에 갈 수 있어도 가지 않는다. 내가 훗날 그런 곳에 살 생각을 해야지 아직 사회적 주체가 안 된 처지에 그런 공간에 길들여진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다.”

정부가 도와주는 건 비자발급 정도였다. 나머지는 현지인처럼 현지에 적응해야만 했다. ‘집구하기’가 지상과제였다. ‘헤이코리안(www.heykorean.com)’이란 집 구하는 사이트를 발견한다. 귀국할 때까지 플러싱, 퀸즈 등 6군데를 옮겨다닌다.

“침대와 옷장 정도만 들어가는 사글세 55만원짜리를 구했다. 잠만 자는 서울역 근처 쪽빵 같은 곳이다. 45만원대는 반지하로 내려간다. 곰팡이와 바퀴벌레를 이길 수 있다면 더 낮은 가격대도 있다. 지옥과 천국의 집이 피라미드처럼 진열돼 있었다. 잠자리가 곧 삶의 수준이었다.”

◆ 유학생 첫 통계청 채용시험에 도전

4개월은 어학연수를 했다. 상당수 유학생은 놀러 다니는데 비중을 두지만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인 스파시설에서 알바를 했다. 시급 8천원 정도. 12시간의 알바, 맨해튼 헌터대에서 4시간의 어학연수. 지하철 타고 귀가했다.

“모자라는 돈은 호주에서 번 돈을 비상금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어학 수준이 별로였다.

“막상 연수를 해 보니 내가 살았던 계명대 내 외국인 기숙사 수준이 오히려 한 수 위라는 걸 알았다. 난 어학연수를 반대한다. 한국에 이미 외국인 원어민 교수들이 많이 왔고, 서울 이태원, 동성로 등지의 각종 외국인 클럽 원어민을 통해 맘대로 영어를 입맛대로 배울 수 있다. 물론 현지 어학연수에서 책에 없는 미국문화를 느낄 수 있지만 비용을 생각하면 연수생산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다. 토플, 영어문법, 에세이 작문, 연극수업 정도를 배운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현지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들은 ‘미국 경제가 바닥’이라서 일자리가 잘 안난다고만 했다. 그는 신문을 검색했다. 당시 뉴욕의 호텔이 가장 호황기를 맞고 있다는 기사를 스크랩해서 보여주었다. 반응이 없었다. 답답한 자가 샘을 직접 팔 수밖에 없었다.

미국 통계청 센서스 조사요원 채용 공고를 봤다. 하지만 유학생에겐 너무 높은 벽이었다. J1비자로는 응시할 수 없다고 했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자기 비자로도 가능하다는 걸 10번 찾아가 설명했다. 그의 집요함에 감동돼 시험칠 자격을 주었다. 현지인과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는 항상 몇 점 차이로 낙방을 했다. 결국 98점까지 올려 최종 합격이 된다. 시급 2만2천원짜리 일자리를 혼자 힘으로 잡은 것이다. 자격증 줄을 목에 걸 때 올림픽 경기장에서 태극기가 올라갈 때와 비슷한 감동이 밀려왔다.

‘여태껏 저런 식으로 자기 자리를 뚫고 들어온 유학생이 없다’면서 통계국 직원들도 대견스러워 했다.

비자만기가 돌아왔다.

“가기 전 미국은 마냥 꿈의 도시였다.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일류도시라고 믿었다. 막상 살아보면 사람 사는 데는 다 같았다. 이젠 어느 나라에 가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청년백수에게 뼈있는 조언을 준다.

“현재 세계 대학생들 모두 어렵다. 이건 세계적 추세이지 한국만의 특수상황이 아니다. 안 부딪치는 자에게는 절대 기회는 없다. 상당수 백수들은 자기는 안하고 자꾸 핑계와 불만만 양산시킨다. 세상도 그렇다. 너무 스펙 위주로 학생을 평가한다. 결국 움직여야 되는 건 자기 자신인데 너무 ‘안전빵 직장’만 찾는다. 나이값도 밥값도 못하면서 욕구는 최고조로 팽배해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박범진= 현재 계명대 관광경영학과 4학년 재학중. 대학 입학하며 부모로부터 완전독립 선언. 머슴살이와 같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1천500만원의 종잣돈을 벌어옴. 교과부가 주관하는 해외인턴사업의 일환인 WEST를 통해 13개월간 뉴욕에서 누구의 도움없이 생계를 해결. 국내 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J1비자를 갖고 미국 통계국 센서스 파트잡 직원이 됨. 귀국 후 카투사에 입대한 뒤 뉴욕에서의 악바리 좌충우돌 유학기를 출간해 미대사관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기도 함. WEST동문회(전체 1천500여명 중 귀국자는 700여명)에서 미국무부 공모전에 지원, 1천400여만원을 받음. 다문화 가정 인식개선 활동과 고교생 상대 ‘글로벌 영 리더’순회강연 진행. 향후 해외 인턴십 관련 지침서를 출간하기 위해 매주 서울 역삼동 컬처콤플렉스에서 강연자 및 운영진 콘퍼런스를 가짐. 현재 WEST동문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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