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대결] 어둠 속의 빛·디테일스

  • 윤용섭
  • |
  • 입력 2013-04-12   |  발행일 2013-04-12 제40면   |  수정 2013-04-12
20130412

★ 어둠 속의 빛

하수구로 숨어든 유대인과 그들을 지켜낸 좀도둑

‘어둠 속의 빛’은 1943년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로보프를 배경으로 한 홀로코스트 영화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하수구에서 14개월간 숨어지낸 11명의 유대인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을 지켜낸 한 남자의 이야기는 당시 실제 생존자였던 한 소녀의 증언을 바탕으로 완성된 로버트 마셜의 소설 ‘르보프의 하수구에서’를 토대로 각색됐다. 주인공은 빈집털이와 하수구 수리공으로 생계를 연명해 가고 있던 평범한 폴란드인 소하(로버트 비엑키에비츠)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하수구로 숨어든 유대인들을 우연히 발견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칩거생활을 도와주게 된다.

‘어둠 속의 빛’은 ‘전장의 로랑스’ ‘유로파 유로파’에 이은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의 세 번째 홀로코스트 영화다. 그녀가 이렇게 홀로코스트 영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홀랜드 감독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홀랜드 감독의 조부모는 유대교도를 강제로 격리한 게토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 참여했던 폴란드 지하그룹의 일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한 중요한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이에 관한 연구 역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인간사의 예외로 봐야 할지, 아니면 우리의 본성에 감춰진 내면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온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홀랜드 감독이 유대인을 희생양 혹은 천사로 미화하거나 나치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재연을 최대한 배제한 이유다. 되도록이면 그들의 감정과 모습을 사실감 있게 담으려 했다. ‘어둠 속의 빛’은 이를 풍성한 드라마의 구조속에서 도덕적, 인간적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들과 그 이면의 본능을 동시에 경험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선한 본성과 악한 내면의 공존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소하는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겉보기엔 성실한 가장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좀도둑에 사기꾼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돈과 보석을 탐내 처음 그들을 숨겨주었지만, 어두컴컴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 놓여있는 그들을 돕는 과정에서 차츰 연민을 느끼게 되고, 어느 순간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그의 여정은 녹록지 않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료와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초래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하는 더욱 강렬하게 유대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유대인들 역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때문에 지옥처럼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평범하게 행동한다. 사랑도 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기도도 올리지만, 이기주의로 인해 모두를 더욱 복잡하고 난처한 상황에 빠트리기도 한다. 분명한 건 그들은 존재했으며,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이름없는 희생자 집단이 아니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건 그만큼 중요했다. 원작 소설의 모태가 된 회고록 ‘녹색 스웨터를 입은 소녀’의 실제 주인공인 크리스티나 히게는 이 영화를 보고 “핵심을 잘 잡아냈다. 그 당시가 꼭 그랬다”고 말했다.

하수구는 영화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배경이자 희망과 두려움, 신과 인간의 관계, 인류애와 희망 등 영화 전반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주제를 함축한 중요한 공간이다. 제작팀은 약 30%를 실제 하수구에서 촬영했고, 나머지는 컨테이너를 이어 어둡고 폐쇄적인 하수도 세트를 완성했다. 이를 통한 빛과 어둠을 삶에 대한 메타포로 적절히 활용해 관객들이 마치 영화 속 주인공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는 여전히 인종·민족·국가·종교를 초월해 인권 회복 차원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둠과 악취만이 존재하는 끔찍한 지하생활에서 그들에게 유일한 빛이 되어준 소하의 행동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소하는 그 후 유대인들을 도와준 대가로 ‘열방의 의인’이라는 타이틀을 수여받았다. 잔인한 전쟁의 굴레 속에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느끼게 만든 홀랜드 감독의 섬세하고도 과감한 연출력이 돋보인 영화다.

20130412


★ 디테일스

꼬여도 너무 꼬여 버린 인생 ‘엽기적 어른들의 동화’

살다보면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 제프(토비 맥과이어)는 일이 꼬여도 너무 꼬인 경우다.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을 가진 결혼 10년 차의 평범한 남자 제프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해 보이지만, 아내 닐리(엘리자베스 뱅크스)와 섹스리스 6개월 째에 접어든 상태. 아내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뒷마당에 잔디밭을 꾸며보지만, 매번 잔디를 파헤쳐놓는 너구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제프는 오랜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레베카(캐리 워싱턴)에게 서먹해진 부부관계를 털어놓던 중 분위기에 휩쓸려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 시간, 제프가 너구리를 잡기 위해 독약을 섞은 참치캔을 옆집 고양이가 실수로 먹어 급사한다. 옆집에 사는 독신녀 릴라(로라 린니)는 우연히 제프의 불륜사실과 고양이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빌미로 제프를 압박한다. 한편, 제프의 신장을 기증받아 새 삶을 살게 된 링컨(데니스 헤이스버트)은 그의 고민을 들은 후 고민한다.

제프는 곱씹듯 말한다. 자신의 인생을 일순간 꼬이게 만든 건 화분, 독약, 신장, 그리고 성인 사이트 때문이라고. 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찬찬히 되짚어 본다. 집 공사를 빌미로 화분을 들고 옆집 릴라를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너구리를 잡기 위해 참치캔에 독약을 섞지 않았더라면,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성인 사이트를 보지 않았더라면, 또 스스로의 죄를 덜고자 링컨에게 자신의 신장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일이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이는 살면서 불필요하게 집착했던 것 때문에 관계를 망쳐버렸던 우리의 사연, 또 살면서 필요 이상으로 무시해버렸던 것들 때문에 힘들었던 우리의 모습들을 반추하게한다. 제이콥 아론 이스터스 감독은 그런 관객들을 향해 “나는 바보 같은 어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2004년 ‘민 크리크’로 선댄스와 칸 영화제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제이콥 아론 이스터스 감독은 ‘디테일스’를 통해 그의 특장과 같은 여러 개의 일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롭게 믹스시키는 장기를 발휘한다. 결혼과 책임 등으로 확장된 이야기와 주제는 전작에 비해 더욱 힘이 느껴지고, 감독 특유의 유머감각과 냉소적인 시선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와 재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무엇보다 코미디로 시작해 비현실적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적 톤은 매끄럽다.

‘디테일스’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놓인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메리칸 뷰티’와 많은 점에서 흡사하다. 특히 물욕, 권력욕에 눈이 멀어 부부가 나눠야 할 최소한의 애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들과 ‘디테일스’의 주인공들은 묘하게 닮았다. 그 과정에서 현대인들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풍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스터스 감독의 말처럼 ‘디테일스’와 ‘아메리칸 뷰티’는 너구리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스터스 감독은 블랙코미디 형식을 빌려 대부분의 등장인물을 욕심 많고 탐욕적이며, 위험한 존재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건 개성넘친 배우들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슈퍼 히어로에서 만성 스트레스로 일상이 지루한 산부인과 의사 제프로 분한 토비 맥과이어를 비롯해, 팔색조 매력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뱅크스, 로라 린니, 레이 리오타 등이 바로 그들. 특히 제프와 사사건건 꼬이는 정체불명의 이웃집 여자 릴라 역의 로라 린니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과장된 표정과 말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해내며, 내 이웃으로 두기에는 꺼려지지만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독신녀로 분해 예사롭지 않은 연기 내공을 선보인다.

‘엽기적인 어른들의 동화’라고도 일컬어지는 ‘디테일스’는 그 덕에 기존 장르와 관습에서 벗어난 신선함과 개성이 넘친 매력적인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