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성의 북한일기 .8] 월북인사의 기자회견…남북간 현실이 서글프다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07-25   |  발행일 2014-07-25 제34면   |  수정 2014-10-17
20140725
1997년 8월 나진시 유치원 공사현장에 종종 들른 북한의 한 고아 소년.
20140725

◆1997년 8월13일 목요일 맑음

나진에 있는 꽃제비 수용소에서는 거리를 헤매는 꽃제비를 잡아다 가두고 아침저녁 두 끼를 주는데, 이것만으로는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고 한다. 간혹 점심 때 빵 몇 조각을 주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말이 하루 두 끼 식사 제공이라고 하지만 보나마나 부실한 식사이리라. 나라에서도 부모 없이 떠도는 어린아이들의 생계를 어떻게 해볼 수 없나 보다. 꼬마들을 수용소에 가두지 않으면 저들은 어떻게 하든지 살아가는데 그놈의 얄팍한 자존심이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있다.

M교수가 이곳의 꽃제비를 도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꽃제비를 수용하는 수용소에 식량을 보급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20~30명쯤은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심스럽게 이 일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선 C부사장과 상의해 보기로 했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시도는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갑자기 예고 없이 무지개식당에 갔다. 황경리가 K목사, B차장과 중국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무지개식당 박 여사는 청진에서 온 66세 된 아주머니 한 분을 소개시켜준다. 박 여사와는 35년 동안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이라고 한다. 아마도 생활이 어려워서 좀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고운 얼굴이다.

아주머니는 “박 여사가 너무 행복해 하면서 자기 복에 이런 세월이 오래 갈지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한다. 나는 “마음뿐이지만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고 답을 했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한 시간만 몰래 있다가 돌아간다는 것이 두 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 신변의 안전과 보위부에서 나의 시간대 움직임을 알리는 것 같다.

◆1997년 8월14일 금요일 맑음

M선생께 알루미늄 공장과 임대주택단지의 명시를 받기 위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설계도면을 건네주었다. 유치원 건설 현장에 나갔다. 24건설대만 미장 공사를 하고 있고 그 외 현장은 공사가 중지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금년에 유치원 공사를 마무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24건설대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 분들에게 늘 고맙다. 오랜만에 장마당(시장)에 나가 보았다. 시장 내부는 공사관계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도로 양쪽으로 물건을 쌓아놓고 팔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붐빌 수 없다. 이렇게 붐비는 곳에 소매치기가 없을 수 없지. 세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이니까. 하마터면 내 지갑을 절 모르고 시주할 뻔했다. 이곳 나진 주민들은 엄청난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M교수가 지난번 흥남에서 온 부인을 다시 만났다고 한다. 이 부인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싶다. 또 C부사장과 꽃제비 수용소에 식량 보급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고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마음뿐이지만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계속해서 이러한 일들을 진행시키기로 마음을 모았다. 도로미화사업소에서 모래를 조금 얻으러 왔다. 우리 회사 차들이 도로를 많이 더럽힌다고 벌금을 내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귀띔을 해 준다. 조속히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좋은 말로 부탁한다. 교직원들과 털게를 먹으려 무지개 식당으로 갔다. 식당 안방에 있는 TV에서 평양 방송이 나오고 있다. 남쪽에서 월북한 오익제씨가 화면에 등장한다. 1년 동안 북조선에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 장면이 나온다.

남쪽에 정치는 파벌주의이고 어쩌고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까지 싸잡아 비판을 한다. 그가 누구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회의 간부로 김대중 총재의 자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오씨는 “조선의 농촌은 살기 좋은 낙원이다. 도시처녀가 시골로 시집을 가면 2칸짜리 집이 있는데 다시 4칸짜리 집을 짓고 있다. 남쪽에서는 어림도 없다. 김정일 장군님은 백두산 정기를 받아 태어나서 백두산은 김정일 장군이요 화신”이라고 하면서 온갖 수식어를 다 동원하여 써 온 메모지를 읽고 있다. 오씨가 참으로 불쌍하게 보인다. 한편으로 남북 간 현실이 서글프다. L실장이 호주 모 교회 J목사와 늦게 도착했다.

전 연변과학기술대 건설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