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 수상작 ‘마음의 마중물’

  •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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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6   |  발행일 2014-08-06 제23면   |  수정 2014-08-06

살다보면 영혼의 곳간이 허전하고 외로워지는 시간이 있다. 출근길의 신호대기 중인 자동차들의 행렬,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 아침인사를 건네는 해맑은 목소리조차도 외롭다. 영혼이 외로워질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현 방식이 있다. 영혼을 마비시키기 위해 죽도록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말없이 훌쩍인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다양하게 결정된다.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착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수시로 외로웠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문득 바닥이라고 느껴졌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해도,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넣어 주어도 머리의 허허로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누구는 나에게 종교를 가지라고 했고 가족들은 중년의 갱년기 증세로 취급하며 무탈한 일상에 감사하며 조용히 살라고 했다.

혼자 아파하고 방황하였다. 바쁘면 잊혀지려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열병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도 내 가슴의 몸부림에 관심없는 이방인들이었다. 교실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일에 충실하였고 그들에게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깊은 허탈감과 슬픔을 느끼며 울었다.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민은 내 마음을 가장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세웠다.

천 길 낭떠러지로 내려간 느낌이 다가섰다. 바닥을 기어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그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독서’이다. 그는 멀리하면 그리움으로 멀리서 손짓하고 그리워서 다가서면 나의 무능을 확인하여 절망감만 안겨주는 파도 같았다. 밀려왔다 쓸려가기를 거듭했다. 오십을 목전에 두고 밀려들어온 이 물결에 온 마음을 담그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매어지기를 소망하였다.

그래서 책읽기 동아리에 나를 매달기로 맘먹었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면 물이 되듯이 연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엿보기도 하고 내 삶을 나누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무게의 동료들이 모였다. 두근거리는 맘을 고르며 서로의 바지랑대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어떤 책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녹여낼지가 고민이었다.

고전을 기웃거렸다. 두꺼운 분량만큼이나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었다. 필독서라는 우아한 옷을 걸치고 있지만 빠른 감동에 익숙한 우리에겐 서걱거렸다. 제목만 널리 알고 있는 허울뿐인 벼슬이었다. 고전이 우리의 대화상대로 적절한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여인과 마주하는 기분으로 고전을 만나보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책상 위에 얹혀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책들을 구했다. (중략)

동아리 이름을 ‘마중물’이라고 지었다. 모두에게 마중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수돗물이 없어서 집집마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펌프라는 물건이 있었다. 지렛대 같은 손잡이를 아래위로 계속 움직여야만 땅 속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구이다. 지하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펌프에다가 물 한 바가지 정도 퍼부어놓고 열심히 펌프질 하면 그 압력에 의해 지하에 있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펌프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 마중물은 한 바가지 정도의 적은 양의 물이지만 물을 붓고 나면 깊은 곳에 있는 샘물을 불러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겐 날마다 말라가는 마음을 퍼 올릴 펌프질이 필요했다. 돌아보면 끈적끈적한 삶의 찌꺼기를 한 움큼씩 가슴에 떨구며 살았다. 부끄러워서 묻었고 힘들어서 숨겼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의 우물은 깊어만 갔다. 우물에 녹아있는 서러움과 절망을 퍼 올리지 않으면 끝없는 고통이 칡넝쿨처럼 삶을 뒤덮을 것 같았다. 슬픔과 외로움을 쏟아내지 않으면 가슴은 아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처음엔 삐걱거렸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펌프가 처음부터 물이 펑펑 쏟아지겠는가. 마음은 찌그덕거리며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체면과 논리를 앞세운 대화는 밋밋하고 어설펐다. 진정성이 필요했다. 혹여 다칠세라 온 마음을 다해 감싸 안았던 자존심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자 상처투성이의 감정들이 힐끗힐끗 눈치보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억울함과 분노가 여과 없이 쏟아지면 감당하기 힘들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감정은 거세게 뿜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서로서로 바닥에 깔린 찌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도록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한쪽으로 기울었던 생각을 곧추세우고 내면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를 화해시키는 지렛대가 되었다.

우리끼리 만나면 괜스레 비실비실 웃음이 나고 말을 하고 싶어졌다. 책을 읽는 사람의 발가벗은 맘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무덤덤한 듯 살아낸 세월의 무게 앞에서 감나무에 혼자 매달린 까치밥같은 쓸쓸함도 나누었다. 일렁이는 글의 행간에 살포시 마음을 걸치면 따뜻한 정이 피어났다. 시들시들하던 맘에도 벗들의 추임새가 뿌려지면 싹이 돋았다.

바위 틈새에 있는 진달래가 성냥개비의 화약처럼 움을 틔우려 긴 숨을 모으고 있다. 우리도 호흡을 모으고 힘찬 펌프질을 위해 손잡이를 움켜잡고 있다. 기나긴 추위와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고 나면 따스한 봄기운도 제일 먼저 닿아 온 산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우리도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삶의 무게를 이기며 고통을 홀가분하게 훌훌 날릴 것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울음을 흘린다고 불행한 인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 가슴에 고인 구정물을 퍼 올려서 흘려보내야 맑은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다. 혼자서는 해내기 힘든 일에 서로를 다독이며 마중물을 부어준다. 뽕잎을 먹은 누에가 명주실을 토해내듯 책을 읽고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낼 것이다.

물을 품을 때 차별을 두지 않는 바다의 마음이 되고 싶고 머무르지 않지만 바꾸고 떠나는 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의 맘이 열로 상기되어 허덕일 때 해열제같은 영혼의 마중물로 살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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