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4] 대한민국 경지정리의 시발점 김천

  • 임훈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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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7   |  발행일 2014-08-07 제11면   |  수정 2014-11-21
전통적 농업노동 해방 ‘첫삽’…기계화영농 전국 확산 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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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김천시 농소면의 경지정리지구를 둘러보고 있다. 김천의 경지정리사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 사업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김천시 제공>

김천은 대한민국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경지정리사업을 시행한 고장이다. 1960년대 경북도의 ‘약진계획(躍進計劃)’에 따라 기계화영농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농지를 개량하는 경지정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64년 김천시(당시 금릉군) 일원의 경지 160만여㎡가 성공적으로 정리되면서 경지정리사업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4편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변화를 추구했던 관료들과 잘 사는 고장을 만들고자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던 김천시민들에 관한 이야기다.


◆ 지게의 고통에서 벗어나다

경지정리는 우리나라 농업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업적이자 전환점이다. 농민을 전통적인 농업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 경지정리이기 때문이다. 경지정리 이전에는 좁은 논두렁 위로 다녀야 했기에 지게를 사용해야 했다. 거름이나 수확한 벼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나르는 일은 농민들에게 고통이었다.

용수 공급도 문제였다. 구불구불한 논두렁 사이로 농업용수가 제대로 공급될 리 없었다. 좁은 논둑사이로 흐르는 수로는 자주 무너져 농민들을 번거롭게 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지게의 노예로 살았고, 농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했기에 생산성도 낮았다. 또한 경지정리 이전에는 논과 밭의 경계가 모호해 농민들 간 시비마저 자주 일었다.

정부는 김천의 경지정리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이 사업의 전국적인 확대를 엄두조차 못냈다. 6·25전쟁과 전후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정부재정은 늘 부족했다. 1950~60년대 자유당 독재에 반발한 4·19 혁명에다 5·16까지 겹치면서 정치상황마저 급변하고 있었다.


주민 동의 이끌었지만 예산문제 봉착
풀 한 포기 손 대지 않으며 아껴왔던
율곡천 제방숲 나무 베어 비용 충당

경지정리 후 토지 되돌려주는 과정서
친척간 좋은 땅 나쁜 땅 따지며 갈등도


대한민국의 행정조직체계도 큰 개발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961년 5·16 이전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시·읍·면 단위로 구성돼 있었다. 현재의 읍이나 면이 독립적인 기초자치단체였다. 조그마한 면 단위 지자체는 공무원 급여를 간신히 줄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고, 대규모 개발사업은 엄두조차 못냈다.

5·16 이후 기존 시·읍·면 단위의 자치제도가 폐지되고 시·군 위주의 체제로 행정개편이 됐다. 이후 지방행정 단위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추진할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후 각 지역의 시장, 군수 중 일부는 영농지도와 지역개발에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행정분야에서의 추진동력이 마련된 것이다.

김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박재환 금릉군수(재임 1961년 7월20일~64년 4월10일)가 경지정리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경북도청에서 근무하다 금릉군수로 부임한 박 군수는 경지정리사업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렀다. 이후 후임으로 부임한 김무연 금릉군수(재임 1964년 4월11일~65년 3월29일)가 박 전 군수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군수의 힘만으로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김무연 군수와 함께 경지정리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김천시 농소면 신촌리의 이윤영 이장이었다. 군 부사관 출신인 이윤영 이장은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마을의 리더였던 그는 경지정리에 반대하는 농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당시 주민들은 농토가 훼손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참여를 꺼렸다.

또다른 한 명의 조력자는 김준식 농소면장이었는데 경지정리가 잘 추진될 수 있도록 군과 주민들 간의 가교 역할을 했다. 군수와 면장, 이장을 비롯한 모든 주민이 뜻을 모아 경지정리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훗날 김무연 군수는 경지정리사업 덕분인지 승진가도를 달렸고, 제14대 대구시장을 지냈다.


◆ 두 손으로 일군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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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농소면 월곡리의 경지정리지구 너머로 김천혁신도시가 보인다. 1964년 경지정리사업 당시 재원이 모자라자 인근 율곡천 제방숲의 나무를 베어 사업비용에 보탰다고 한다. <김천시 제공>

지역개발에 대한 공직사회의 관심이 컸지만 열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특히 경지정리에는 큰 비용이 들기에 섣불리 추진할 수 없었다. 경남·전라도의 곡창지대가 아닌 김천이 경지정리에서 앞선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사업의 비용문제를 해결한 덕분이다.

김무연 군수를 비롯한 주민들 역시 경지정리에 애를 썼지만 비용문제는 큰 걸림돌이었다. 측량 등 기술적인 부분은 군에서 지원하면 그만이지만, 예산문제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업 성공을 위해선 어떻게 해서라도 재원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경지정리사업 지구를 흐르는 지방하천인 율곡천 제방숲의 나무를 베어 파는 것이었다. 율곡천 양안 1.5㎞씩 총 3㎞구간의 제방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참나무가 가득 있었다. 이 제방숲은 농지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천정천(天井川)’인 율곡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조성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그동안 제방을 지키기 위해 제방의 풀 한 포기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제방숲에는 소를 들이지 않았고, 숲에 낫을 대는 주민에게는 마을 규약에 따라 벌금을 부과할 정도로 엄격히 관리했다. 비가 많이 내려 제방이 넘치려 하면 섶으로 제방을 막으며 숲을 지켜왔다.

주민들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결국 제방숲의 나무를 베어 경지정리 비용으로 댔다. 지금도 월곡리 주민들은 “문화재 같은 그 숲을 베어버렸다. 뼈아픈 일”이라며 옛 제방숲을 기억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비교적 지형이 평탄한 농소면 신촌리에서 1963년 경지정리사업이 먼저 이뤄졌다. 1년 뒤인 64년, 농소면 월곡리에서도 경지정리 사업이 진행됐다. 예산이 넉넉하지 못해 대부분의 작업은 사람의 손으로 이뤄졌다. 덤프트럭 등 중장비의 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다. 주민들은 삽을 들고 소달구지를 끌며 힘겨운 경지정리 작업을 이어나갔다. 경지정리 사업장의 감독 격인 공무원들은 측량을 해주는 정도였고, 주민들의 노력 동원으로 대부분의 작업을 진행했다.

경지정리 사업에는 꼬박 6개월이 걸렸다. 주민들은 가을 추수가 완료되자마자 작업을 시작해 겨우내 경지정리에 동참했다. 보유한 땅 넓이에 따라 작업일수가 달랐다. 땅을 많이 가진 주민이 많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촌인구가 많았기에 작업은 그리 어렵지않게 이뤄졌다. 겨울철 꽁꽁 언 땅에서의 작업은 힘들었지만 사람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계산상이지만 한 가구가 하루에 10㎡의 작업만 하더라도 100가구로 계산하면 1천㎡의 작업량을 완수할 수 있었다. 측량기사가 말뚝만 박아주면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지정리와 관련한 갈등도 불거져나왔다. 경지정리 후 땅을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친척끼리 칼부림이 나기도 했다. 좋은 땅 나쁜 땅을 따지다 갈등이 생긴 것이다. 주민들은 자신의 농토에서 떼넨 보류지(保留地)를 팔아 사업비용을 댔는데 이와 관련한 갈등도 존재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김천의 경지정리사업은 중앙정부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1965년 2월12일, 금릉군의 경지정리지구를 둘러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농소면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정일권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전체, 각 도지사들을 대동한 채 경지정리지구를 둘러보았다. 65년 20세였던 김정기 전 김천시의회 의장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지프차를 타고 온 대통령이 월곡1리 마을회관에서 농로를 이용해 신촌리까지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새까맣고 조그마한 사람이 차를 타고 가는데 대통령이 분명했다”고 말했다. 이후 김천의 경지정리사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한민국 농업이 기계화영농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 것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도움말=김정기 전 김천시의회 의장
▨참고문헌=디지털김천문화대전
공동 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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