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4] 아! 자고산, 45인의 미군포로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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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7   |  발행일 2014-10-17 제11면   |  수정 2014-11-21
동료의 주검 속에서 숨죽인 5명만 살아남았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 스토리 브리핑

칠곡 자고산 303고지는 40여명의 미군이 희생된 역사의 현장이다. 1950년 8월15일, 자고산에 있던 미군 1기갑사단 제5기병연대 H중대 박격포소대는 순식간에 적의 포로가 된다. 전날 포위된 사실을 알았지만 ‘국군이 곧 증원하러 올 것’이라는 말을 믿고 기다리다 화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소대원들은 산으로 올라오는 북한군을 증원하러 오는 국군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붙잡힌 북한군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들은 정신을 잃었는지 멍하게 서서 전혀 전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포로로 잡힌 미군들은 신발과 옷이 벗겨진 채 끌려다니다, 이틀 후인 17일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다행히 17세였던 프레드릭 라이언 이병과 18세였던 로이 맨링 이병을 포함한 미군 5명은 시신 더미에 깔려 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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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으로 살아남은 미군 병사. 45명의 소대원 중 5명은 시신 더미에 깔려 있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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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박격포소대원들은 자고산 자락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안질마을 인근 도랑에서 학살당했다. 당시 미군 군목이 포로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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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산 정상에는 미군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한·미 전몰장병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2010년 6월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한 추모비 제막행사 모습.

#1. 시신 썩는 냄새가 온 산을 헤집었다. 산 자의 시선은 시체 더미를 피할 수 없었고, 주검의 무리는 시선 아래에 고정됐다. 썩어가는 몸뚱이는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목을 잃은 채였다. 구더기는 꿈틀거리며 주검 위를 거칠게 파고들었고, 파리들은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 웽웽거리며 달려들었다.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인 자고산 303고지. 그곳은 죽은 자가 뿜어내는 퀭한 냄새와 살아남은 자의 열기가 한데 엉켜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자고산은 그 경계의 꼭짓점에 서있었다.

1950년 8월15일 아침. 프레드릭 라이언 이병은 평소처럼 동료들과 아침식사 중이었다. 주검의 역한 냄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그것은 일상이었고, 피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자도 없었다. 밥그릇 긁는 소리만 달그락거렸다.

“고향의 어머니는 잘 계실까.”

잔반을 처리하던 로이 맨링 이병이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윗도리를 벗은 맨링의 몽뚱이는 앙상했다. 도드라진 갈비뼈와 등뼈는 가죽만 남은 늙은이의 몸처럼 보였다. 전쟁은 병사들의 뼛속 살점까지 도려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

라이언의 풀죽은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는 여전히 적군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라이언과 맨링은 미군 1기갑사단 제5기병연대 H중대 박격포소대 소속이었다.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며칠 전 자고산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적의 남하를 막아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왜관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고, 고지 위에서 포를 쏴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자고산은 24시간 전쟁의 기운이 스멀거렸다. 상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는 한, 시신과 함께 식사를 하며 적의 동향을 살펴야 했다. 기약 없는 방어전이었다.


증원만 믿고 있던 미군
적군을 아군으로 오인
총 한번 못쏘고 사로잡혀

가혹한 포로생활 끝에
북한군에 40명 총살당해


#2.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대장의 따지는 듯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무전을 하는 중간중간 목소리는 격해졌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격한 손짓을 하기도 했다. 소대장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갔다.

“조만간 한국군 60여명이 증원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무전기 저편 G중대장의 답변은 ‘안심해도 좋다’였다. 하지만 소대장은 불안한 기색을 떨칠 수 없었다.

일은 전날 밤에 터지고 말았다.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했지만 적의 남하는 계속됐다. 북한군은 왜관 북쪽 10㎞ 지점에 수중가도를 만들어 어둠을 틈타 도하했다.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이, 국군 1사단 13연대가 있는 328고지를 공격한 것도 전날 밤이었다. 328고지 공격과 동시에 북한군 연대병력 일부는 전차 두 대의 엄호를 받으며 밤 사이에 자고산으로 접근해왔다. 이 때문에 라이언과 맨링이 소속된 박격포소대와 같은 연대 소속이었던 G중대가 포위되고 말았다.

소대장이 G중대장에게 무전을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탈출명령도 없이 ‘기다려라’는 답변이 전부였다. 포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격포소대원 중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소대장에게 달려가 무슨 일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또 다른 병사는 도망이라도 칠 모양으로 군화 끈을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부분 ‘기다리면 국군이 증원하러 온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더 이상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무에 기댄 채 연신 하품만 하는 병사도 있었다. 짧은 동요는 금세 사그라졌다. 정적이 다시 찾아왔지만 라이언은 한기를 떨칠 수 없었다. 스산하고 오싹한 기운이었다.

“별일 없겠지?”

맨링이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군화 끈을 조이는 손에는 검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래, 별일 없을 거야. 국군이 곧 증원하러 온다고 하잖아.”

맨링을 안심시키려 한 말이었지만 라이언 역시 불안을 떨칠 수는 없었다. 한기는 갈수록 더해갔다.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3. G중대와 H중대 박격포소대가 자고산에서 포위됐다는 소식은 빠르게 상급부대에 전해졌다.

“지금부터 아군의 탈출을 돕는다. 지휘는 내가 직접 한다.”

5기병연대장 콜럼버스 대령은 G중대와 박격포소대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도록 포격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자고산을 포위한 북한군은 700여명으로 추산됐다. 공격에 나선 미군은 적진을 향해 사정없이 포격을 가했다. 포탄의 굉음은 산 전체를 찢어 놓을 듯했다.

“지금 이곳을 빠져나간다.”

아군의 포격이 계속되는 사이, G중대장은 탈출명령을 내렸다. 중대원들은 재빠르게 산속을 헤쳐나왔다. 산은 깊었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포탄의 시커먼 연기를 삼킬 듯 빨아들였다.

“박격포소대는?”

탈출에 성공한 G중대장의 급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서로 눈만 마주칠 뿐이었다. 박격포소대의 모습을 본 중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4. 박격포소대는 여전히 자고산에 남아있었다. G중대가 탈출한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다. ‘국군이 증원하러 온다’는 말만 믿고 기다릴 뿐이었다. 포격이 잠시 멈춘 자고산은 다시 정적이 흘렀고, 시신 썩는 냄새는 산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아군이다!”

경계병의 외마디가 짧은 정적을 깼다. 소대원들의 시선은 일제히 산 아래로 향했다. 200명이 넘어 보이는 보병이 산 아래 낙동강 강변도로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맨링의 굳은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박격포소대의 상황이 급박하게 바뀐 것은 한순간이었다. 강변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보병을 향해 경계병이 수차례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소대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국군의 도움을 받아 곧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지루한 정적이 흘렀다.

“적이다.”

경계병의 목소리가 산허리를 갈랐다. 그 사이 10m 지척에 보병의 대열이 무리 지어 있었다. 모자에는 붉은 별 문양이 선명했다. 국군으로 믿었던 그들은 바로 적이었다.

‘아!’

라이언의 입술을 타고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미처 손쓸 틈도 없었다. 저항할 수도 없었다. 멍한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아군으로 알았던 보병이 적이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적들의 눈은 라이언을 날카롭게 겨누었다. 단검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반질반질한 총부리가 햇빛을 받아 빛이 났고, 총에는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소대장은 어쩔 수 없이 ‘항복 명령’을 내려야 했다. 명령을 받은 소대원들은 힘없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박격포소대 45명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순식간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5. 북한군은 서둘러 산 아래로 향했다. 진지로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시키는 대로 하면 포로수용소로 보내주겠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북한군은 극도로 잔인했다. 포로들의 신발과 옷을 벗긴 채 자고산 곳곳을 끌고다녔다. 손은 군화 끈으로 묶인 채였다.

라이언은 쉴 새도 없이 산속 이곳저곳을 끌려다녔다. 움푹 팬 땅에 발이 푹푹 빠질 때마다 몸은 휘청거렸다. 앞서 걷던 포로의 몸도 휘청거렸고, 뒤따르던 포로 역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땅에 눈을 박고 걸었지만, 포로들은 계속해서 휘청거렸다.

비탈길을 빠져나오던 맨링도 휘청거렸다. 맨링의 몸은 결국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처박혔다. 겁에 질린 그의 눈이 라이언과 적군을 번갈아가며 마주쳤다. 눈동자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북한군은 가당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친 발길질이 맨링의 가슴을 짓눌렀다. 머리를 감싸며 몸을 둥글게 말았지만 발길질을 밀쳐낼 도리가 없었다. 맨링의 비명은 멈출 줄 몰랐고, 북한군은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박격포소대원들을 구출하려는 아군의 공격은 계속됐다. 포탄의 굉음은 갈수록 거세졌고, 북한군은 안절부절못했다. 맨발로 끌려다니던 포로들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었다. 돌부리에 걸린 발바닥은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고, 가시에 찢긴 허벅지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8월17일. 미군의 강한 압박에 북한군은 크게 당황했다. 포격은 자고산에 집중됐고, 전폭기의 공중공격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다. 포탄을 맞은 검은 시신 더미는 하늘로 솟구쳤고,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쇳덩이가 시체를 뭉갰다. 산 전체를 날려버릴 듯한 기세였다.

“지금 바로 철수한다.”

북한군 장교의 철수명령은 짧고 간결했다. ‘포로수용소로 데려가겠다’던 그들이 갑자기 돌변한 것도 그때였다. 거친 발길질과 총으로 위협하며, 45명의 포로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자고산 자락 얕은 계곡(현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 안질마을 인근 도랑)에 쑤셔 박듯이 밀어넣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놈들을 데리고 가다가는 우리도 죽는다. 지금 여기서 포로를 모두 사살한다.”

명령을 내리는 북한군 장교의 시선이 라이언의 좁은 어깨에 꽂혔다. 섬뜩하고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드르륵…드르륵….’

다발총의 굉음과 함께 붉은 피가 토해졌다. 총탄은 살을 푹푹 파고들었고, 포로들은 버둥거리며 고꾸라졌다. 라이언의 몸도 총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처박혔다. 쓰러진 동료들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주검의 무게는 질펀하고 육중했다. 라이언은 터져 나오는 마른 기침을 억지로 틀어막고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또 하나의 둔탁한 몸이 라이언을 덮쳤다. 몸은 버둥거렸고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맨링이었다. 총알이 박힌 그의 다리에는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맨링의 간절한 눈빛이 라이언을 향해 껌뻑거렸다. 하지만 숨을 죽여야 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시신 더미로 파고들었다. 핏물이 뭉클거렸고, 식은땀이 두 눈을 찔렀다. 동료들의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또 다른 총격소리. 얼마 후 정적이 찾아왔다. 낯익은 미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뒤 다발총으로 난사했다고 한다. 마지막 포로까지 쏜 북한군은 다시 돌아와 권총으로 확인사살까지 했다. 다행히 라이언과 맨링을 포함한 5명은 시신 더미에 깔려 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북한군이 현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들이 들어왔지만, 살아남은 포로들을 적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다행히 포로들을 알아본 아군은 응급처치 후 후방으로 후송했다. 현재 미군포로학살 현장인 자고산 자락 안질마을 인근 도랑에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자고산 정상에도 한·미 전몰장병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2010년 6월,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한 비석이다. 왜관읍 미군기지 캠프캐럴에도 추모비를 세워 당시 희생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영남일보 DB, 칠곡군 제공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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