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일체 서화가 석경 이원동

  • 이춘호
  • |
  • 입력 2014-12-19   |  발행일 2014-12-19 제37면   |  수정 2015-01-30
선승 같이 내리 친 ‘가지없는 대나무’…“나는 늘 혼자이며 불제자다”
20141219

  김천의 한학자 집안서 출생
  고교 은사 박근술 선생 영향
  서예가의 길로 들어서

 

  돌가루에 아교 등 섞어
  석채 물감 직접 만들어 사용


  “내 작품은
  공짜도 외상도 할인도 없다” 
  대구 남구 예움갤러리에서
  30일까지 21번째 개인전 열어

 

경지(境地)!

‘성격’이 ‘성품’을 넘어 ‘성정(性情)’의 영역에 들면 비로소 발아될까. 많이 팔려는 마음, 높아지려는 마음, 유명해지려는 마음, 자신이 대가라는 마음이 작품 안에서 다 녹아버리면 비로소 발동될까. 이 경지를 탐하려면 한 시절 사람이기를 포기할 것. ‘탈속(脫俗)’의 단계에 머물면 안 된다. 다시 속계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런 경지라면 우열도 없다. 단지 해석하는 문외한의 편견만 존재할 뿐. 경지가 아니면 결국 말이 많아진다. ‘폼’을 잡다가 결국 자멸한다.

기술이 절정에 달하면 ‘장인’이 된다. 장인의 솜씨가 절정이 달하면 비로소 ‘예술’이다. 장인은 예술가로 승화되기 어렵다. 장인의 경지까지는 ‘있는 길’만 가면 된다. 하지만 예술가는 ‘없는 길’을 개척한다. 장인의 경지까지는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예술은 노력을 해도 안 될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장구한 법이다.

20141219
◆서화일체에서 화선일체로

석경(石鏡) 이원동(李元東·56). 1998년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서예·문인화 통합 공모전에 출품된 3천여점 중 한 점이었다.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39세. 95년 첫 개인전 직후 3년이 흐를 무렵이었다. 지역은 물론 한국 서화계의 기대주가 된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서화계의 블랙홀이었던 대구 출신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 그의 문중에도 경사였다. 석재는 지역 근대시서화 연구의 신지평을 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만들고 훗날 영남서예계를 주름잡는 제자를 길러낸다. 석재의 법맥은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과 그의 아들 야정(野丁) 서근섭(徐根燮)을 거쳐 천석(千石) 박근술(朴根述),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석경(石鏡) 이원동(李元東)에 이어진다. 천석은 석경의 고등학교 은사였고 그 때문에 붓을 잡는다.

40년째 붓을 들고 길을 닦고 있다. 그림이라지만 실은 마음의 한 경지를 노린다. 무사와 선사의 눈매를 겸장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기운을 공유하고 있다. 경주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할 때 마음의 거처에 대해 오래 궁구했다. 한때는 대가(大家)의 경지가 궁금해서 판소리꾼 박동진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거장을 찾아다녔다. 다들 자기가 대가가 아니라고 했다. 그냥 묵묵히 작업만 한다고 했다.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20대 때는 도사가 되고 싶어서 지리산 속에서 눈을 감기도 했다. 뭔가를 기억해서 계획해서 차츰 알아가면서 그리는 그림은 절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믿었다. 문득 초인적 작흥(作興)이 몸 안으로 스며들 때, 그때 번개처럼 어떤 색과 모양을 낚아채야 ‘신품(神品)’이 태어나겠지.

언제 신탁(神託)이 마음을 침공할지 모르니 항상 내면을 투명하게 중립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사람과 노닥거릴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굳이 누구와 허교할 필요도 없다 싶었다. 그렇다고 일상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못 은둔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탈속적이다.

◆ 脫사군자풍의 대나무

석경에겐 항상 ‘대나무 작가’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대나무는 매번 변주되었다. ‘어떤 그림을 보는 순간 조건반사적으로 어느 작가가 떠오르면 그 작가는 죽었다’는 게 그의 지론. 여느 화가와 생각이 달랐다. 정형화 된 대나무는 죽은 대나무라 여겼다.

20회 개인전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댓잎 없는 대나무였다. 가로 1.2m 세로 2m 크기였다. 댓잎과 줄기는 이심동체였다. ‘댓잎이 줄기고 줄기가 곧 댓잎’이란 메시지였다. 기존 대나무는 기승전결이 있었다. 처음에는 줄기(竿), 다시 가지(枝), 그 위에다 잎(葉), 마지막에 마디(節)를 그렸다. 대다수 그 틀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에겐 이런 작법이 구차스러웠다. 절차를 다 생략했다. 순식간에 세로로 세운 한 일(一)처럼 대를 내리쳤다. 댓잎과 가지가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욕망은 죽이고 청수(淸瘦·맑고 삐쩍 마른듯한)한 의지만 고사목처럼 세운 것이다. 마치 선승의 외마디 깨우침의 꾸짖음인 ‘할(喝)’처럼.

첫 개인전 작품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길이 10m짜리 초대형 대나무. 2010년 15회 개인전에 나온 대나무는 분청사기 속에서 발굴한 대나무 같았다. 회분이 잔뜩 묻어 있는 도판(陶板) 같았다.

20141219
‘킬리만자로 표범’처럼 늘 독행하는 석경 이원동.이 사진은 17년째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 대구시 중구 대봉동 석경서화원 내부 전경.
◆ 천불장엄展 이야기

자신을 그냥‘어수룩한 그림이나 그리고 사는 늙은이’로 불러 달란다. 그의 어수룩함은 겸손이 아니라 바로 ‘자존감’. 유명한 자가 안 유명해질 수 있는가. 어렵다.

모르긴 해도 18세기 중국 사상 첫 서예계의 이단아였던 판교 정섭의 좌우명인 ‘난득호도(難得糊塗)’의 경지를 겨냥한 걸까. 난득호도,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지만 총명함에서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기는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마흔도 안된 새파란 나이에 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축하전화가 걸려 온다. 순간 ‘이러다가 내가 허물어 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핏방울처럼 돋아났다. 제자한테 전화를 받게 하고 산에 들어갔다고 둘러댔다. 전시회 오픈행사도 ‘민폐’다 싶어 3회 때부터 치웠다. 갑작스러운 유명세가 얼마나 스스로를 신독(愼獨)하지 못하게 만들고 구차스러움까지 가세하는지를 절감한다. 서둘러 세상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모두 끊어버린다. 10년간 두문불출했다.

김천의 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의 안목과 서예 위에 구축한 사군자. 2001년 5회 개인전의 한 작품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늘 혼자다. 산에서 살아서 향기로운 꽃이고 싶다.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해 3월 그가 또 한번 사람을 놀라게 한다.

금가루를 도예가가 잘 사용하는 ‘물덤벙 기법’으로 묻힌 금니 천불장엄전(千佛莊嚴展)이었다. 팔공산 은해사 거조암에 봉안된 오백나한상 같았다. 기기묘묘한 표정과 기운을 담은 가로 15㎝ 세로 15㎝ 크기의 미니 불화 1천 개를 봉산문화회관에 걸었다. 묘법연화경(일명 법화경)을 금분으로 사경해 펼쳐놓은 것 같았다.

◆ 별의별 수제 물감 이야기

동양화와 서양화의 온갖 색과 모양을 다 실험해 본 뒤 급기야 새로운 물감이 필요해 석경표 석채(石彩)를 만든다. 석채는 일명 돌가루에 아교 등을 섞어 만든 물감.

소일할 때 물가에 자주 앉아 명상에 잠기곤 한다. 물 속에 잠긴 돌의 색깔이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었다. ‘돌의 그 빛깔이 그림으로 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벽돌, 옹기 등도 갈아서 사용해 봤는데 자연스럽지 못했다. 모래가 섞인 퇴적암 종류가 색깔이 제일 명료했다. 전국에서 채집한 돌은 쇠절구에 넣고 빻은 뒤 물에 넣고 젓는다. 윗물을 다른 용기에 부어서 침전시키고 침전 되고 위에 뜬 물은 버리고 남은 앙금을 말리는 수비 과정을 거친다.

◆ 내일 개막되는 21번째 개인전에서는…

95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20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그간 발표한 1천 점이 넘는 작품을 일별하면 ‘도대체 이게 한 작가의 작품인가’란 의문이 들 정도로 개인전 때마다 작풍(作風)이 달랐다.

20일부터 30일까지 남구 봉덕동 예움 갤러리에서 21회 개인전을 연다. 또 변신이다. 불과 6개월전, 20회 개인전(대숲에는 그림자가 없다)에서 ‘탈사군자적 대나무’를 섬뜩하게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돌연 ‘목가·전원풍’으로 터닝했다. 1호짜리 초소형 도판 같은 작품 164점을 ‘고려 변상도(變相圖)’처럼 펼쳐 보인다. 이번 작품은 한지죽을 부조형식으로 형태를 만들어 그 위에 석채로 그림을 완성했다. 산, 들, 하늘, 구름 등이 주종을 이룬다. 대중의 힘을 믿고 작품 하나에 30만원을 걸었다.

◆ 석경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니…

채우려면 새로운 게 아무 것도 없다.

비우면 모든 게 새로운 것. 예술가는 혼자여야 한다. 돌아가신 스승이 ‘맹수는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는 조언을 주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혼자 다니게 됐다.

동양화는 태생적으로 장르적 제약조건이 있다. 글로벌 시대, 어떤 섹터에 감금된 동양화로 고사되고 있다. 이걸 극복해야 된다. 제발 이건 서양화, 저건 동양화라고 구획짓지 마라. 동양화가 가장 한국적이라서 가장 세계적이라는데 그걸 극복해야 세계적인 게 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지금 내 화풍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일 그릴 수 있다. 알면 이룰 게 뭐가 있는가.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 친구를 만나면 친구의 친구, 밤에 가게에 라면 사러가면 그냥 손님일 뿐이다. 내 손에 붓이 없으면 그냥 이원동이다.

공짜로 자기 그림을 선물하지도 외상으로 주지도 할인해주지도 않는 은둔형 화가. 그 도도함이 이 촙고 고독한 일상 곁에 ‘햇살’처럼 놓여 있다.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