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4· (끝)]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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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윤자 시민기자
  • 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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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亂 전공이후 ‘명나라 국운 쇠퇴’ 직감…조선땅 남은 ‘영양천씨’청도 에 터 잡아

갈지리(葛旨里)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의 황강서원에는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천만리는 임진왜란 당시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참전했으며,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지만 다른 귀화장수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황강서원의 중심인 강당의 모습. ‘황강서원(皇岡書院)’이라 적힌 편액이 서원의 부속 건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1. 명나라 귀화장수를 모신 황강서원

칡넝쿨이 많이 엉켜있어 이름 붙여졌다는 청도군 금천면의 ‘갈고개’. 경산시와 청도군을 경계 짓는 이곳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우 차가 다닐 정도의 좁은 도로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낮아지고 넓어진 데다 포장까지 되어 옛 고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경산시 남산면에서 이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청도군 금천면이다. 갈고개 인근에서 마을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葛旨里)에 다다른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다고 이름 붙여진 ‘구터’,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양의 지형을 따라 붙은 이름 ‘구복(龜伏)’, 세 개 성씨가 함께 산다하여 지어진 ‘삼성(三姓)’ 등 몇 개의 자연부락이 모여 있는 갈지리는 넓은 차도를 두고 나뉘어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산골마을로 남아있다.

갈지리는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세거지 중 한 곳으로, 천씨들이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마을에 남아있다. 1833년(순조 33) 인근 소천리 천석규(千錫奎)의 집에서 소중히 감추어두었던 문서와 영정이 발견되었다. 문서와 영정은 귀신상자 속에 있다고 해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집에 불이 나고서야 비로소 그 내용물이 확인됐다. 비록 일부가 불에 타버렸지만 절반 이상 남은 영정과 문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이며 조선에 귀화한 영양천씨의 중시조인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 장군이 남긴 것들이었다.

천만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대황산 아래 삼성마을 위쪽에 사당이 건립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한 황강서원(皇岡書院)도 세워졌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이후 영당만 복원하여 장군의 영정을 봉안했다. 1952년 임진년에 장군의 후손과 유림이 의논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에는 삼문과 강당, 사당인 충장사(忠壯祠)와 부속 채가 있다. 강당의 뒤편에 위치한 충장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구조이다. 문관이 아닌 무인을 기리는 장소답게 충장사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기둥 위로 새의 날개처럼 장식이 뻗어나온 익공집 구조로 정면의 문에는 흔치 않은 휘어진 상인방(문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이 있다. 이는 명나라 출신의 장수가 모셔져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건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고, ‘황강서원(皇岡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현재 황강서원에 봉안된 천만리의 영정은 복사본이다. 원본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몇 차례 도난 사고를 당한 후 문중에서 원본을 국학진흥원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고미술품 감정 전문가는 장군의 영정을 불화 풍으로 그린 독특한 형태라며 높이 평했다.


명 황제 命 받고 총독장으로
철기군 2만 인솔해 왜군 섬멸
함께 온 두 아들도 특전 누려

만주서 일어난 후금 침공 후
명나라 후손 압박 심해지자
청도 등 산간벽지로 흩어져

#2. 천만리, 만리타향 조선으로 오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야심을 품고 명 정벌의 단초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그해 4월 부산 동래로 상륙한 왜군이 삼포로 북진하여 전 강토를 침공하자, 선조는 도성을 비우고 의주에 머물렀다.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에 한음 이덕형을 청원사로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천만리는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 이여송과 더불어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서 두 아들 상(祥)과 희(禧)를 데리고 철기군 2만명을 인솔하여 조선에 건너왔다.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 이승훈(李承勛) 등 명나라의 무인들과 병사들은 귀국하였으나, 천만리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 땅에 남았다.

천만리가 고국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안으로는 정치부패와 도처에서 발생하는 민란, 밖으로는 몽고족의 공격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한 후금의 누르하치(청태조) 세력은 명나라를 계속 압박했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에 원군까지 보낸 명나라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되는 만주족의 침공으로 명나라의 전쟁비용은 늘었으며, 국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는 것을 천만리는 직감했다. 망한 나라의 장수로 만주족의 나라에 흡수되어 비굴하게 살기보다는 후손들이 머무를 땅으로 조선을 택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치하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전(田) 30결(結) 등을 내렸으며, 그의 아들 상(祥)은 한성부좌윤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찰방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은 병역과 잡역을 면제받는 특전을 누렸다. 천만리는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숙종 때는 왜란 평정의 은혜를 기리면서 명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 천만리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다. 순종 때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천만리에게 내려졌다.

조정의 극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천만리 후손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은 임진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이 쇠진한 틈을 노렸다. 후금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의 기운이 높은 조선을 정묘(1627), 병자(1636)년에 침공하였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수모까지 당하였다. 그 후 명나라 사람에 대한 압박이 극심하여 장군의 자손들은 화를 면하기 위해 청도 등 산간벽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연락마저 끊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이름과 관향을 바꾸어 숨어 살았다는 기록이 족보에서 발견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료(史料)나 전적(典籍)이 온전히 유지·보존될 수가 없어 오늘날 장군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그나마 장군이 함북 명천(明川)으로 들어가 살면서 시문(詩文), 화상(畵像) 등을 남겨 금강산 성조암에 맡겨둔 것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다행히도 씨족의 뿌리가 알려졌다.

영양천씨 종사록에 의하면 시조 천암(千巖)은 중국 서촉의 천고봉 만인암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한 중시조 천만리는 12세 때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급제했다. 너무 어려 벼슬에 나가지 못했지만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했다. 어머니 전씨가 그를 잉태하고 먼 곳으로 가는 태몽을 꾼 후 이름을 ‘萬里(만리)’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먼 길을 떠난 그의 일생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글·사진=천윤자<경북 스토리 기자단> kscyj83@hanmail.net

공동기획: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경상북도 문화콘텐츠진흥원, 경상북도,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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