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8] 담양 창평고씨 양진제 종가 ‘죽염장’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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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2-26   |  발행일 2015-02-26 제22면   |  수정 2015-02-26
씨간장과 죽염 360년 만의 첫만남…깊게 빠져드는 ‘시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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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담그는 항아리로 가득한 양진제 종택 마당.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들을 보게 되면 문득 고향에 대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추억 중 추운 겨울 메주 쑤는 날, 무쇠솥에서 모락모락 새나오는 구수한 콩 익는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할머니가 한 줌 쥐여 주는, 삶은 메주콩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따끈하고 구수한 맛, 지금 아이들은 맛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옛 시절 콩으로 만드는 간장·된장은 서민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음식 맛을 내는,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모든 면에서 많이 풍족해진 요즘, 전통 장(醬)은 가공산업의 발달로 대량생산되는 제품들로 인해 점점 잊히고 사라져 가고 있다. 정성을 다해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는 집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종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몇몇 종가는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에는 전통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특별한 전통 장을 대량으로 생산해 판매하는 종가가 있어 옛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있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의 양진제 고세태 종가로, 360여년을 지켜온 가문의 전통 장을 계승·발전시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봉(霽峰) 고경명(1533∼1592) 가문인 창평고씨 양진제 종가는 10대 선조로부터 내려온 씨간장을 바탕으로 대나무 고장인 담양의 특성을 살린 죽염을 만들어 이용한 죽염장을 개발, 전통 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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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제 종가 ‘죽염장’의 핵심 재료인 죽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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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제 종가 죽염간장. 왼쪽부터 청장, 중간장, 진장.


소나무 장작에 구운 죽염으로
종부가 직접 된장·간장 담가
짠맛 줄이고 감칠맛은 더해

간장 오래될수록 색깔 진해져
1년된 청장은 오이냉국·김밥
5년된 진장 갈비·육포에 사용

◆360년 씨간장, 죽염과 만나다

죽염장은 고경명의 14세 후손 며느리이자 고경명의 고손자인 고세태의 10세종부 기순도씨가 일궈온 종가음식이다. 아들인 양진제 종가 11세 종손인 고훈국씨 부부와 함께 죽염을 이용, 간장을 비롯해 된장, 청국장, 고추장, 식혜 등을 대량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기순도 종부는 곡성군 죽곡면의 명문가 기씨 가문의 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24세 때(1972년) 중매로 양진제 종가의 며느리(남편 고갑석)가 되어, 10번이 넘는 제사상과 시댁 어르신 생일상 차리는 일을 하며 시어머니로부터 장류를 비롯한 종가음식을 배우게 된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남편은 결혼 전부터 승려가 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스님의 상좌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종손이 승려가 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가족들이 억지로 환속시켜 종택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종손은 산으로 들로만 나도는 생활을 했고, 사람들은 ‘고도사’라 부르기도 했다.

“남편은 속세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항상 산속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중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잊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후 종손이 부인 기순도 종부를 불러 “나는 명이 짧으니 가족들이 살 만한 기반을 만들어 주고 산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종손은 양봉을 시작했다가 다시 죽염을 굽기 시작했다. 종택 근처의 대나무에 부안에서 나는 천일염을 넣어 소나무 장작에 구웠더니 죽염에서 단맛이 감돌았다. 종부는 남편이 구운 죽염으로 간장·된장을 담가보았고, 장에 감칠맛이 훨씬 더해졌다. 360여년을 이어온 종가의 씨간장이 죽염을 만나 더욱 발전한 전통장으로 탄생,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담양 대나무와 부안 천일염으로 만드는 죽염장

양진제 종가 종부가 죽염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인 1985년이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종손이 온 정성을 다해 소나무 장작으로 대나무에 구운 죽염을 사용한 장류는 종부의 손맛이 더해져 각별한 감칠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갈수록 생산량을 늘려갔다.

죽염장은 1992년 남편이 고려기업을 창업하면서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되고, 1996년에는 정부의 전통식품업체로 등록되었다. 1999년 고려전통식품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기순도 종부는 2008년에 한국전통식품 명인 제35호(장류)로 지정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종부를 중심으로 식구들끼리만 죽염장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직원이 20여명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서울의 유명 백화점 곳곳에도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장류를 담그는 항아리도 1천개로 늘어났고, 1년에 40㎏들이 천일염 2천300가마를 쓴다고 한다.

종부의 아들과 딸은 식품공학을 전공해 장맛 유지와 생산관리를 보다 전문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조력자가 되고 있다. 특히 맏아들인 고훈국 종손은 부친이 하던 죽염 제작을 맡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최신식 대형 죽염로를 설치해 가동하고 있다. 지금도 소나무 장작을 사용한다. 대나무는 종택 주변의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장은 1년에 한 번 담근다. 동짓달 말날(음력 11월의 ‘오(午)’ 자가 들어간 날)을 받아 메주를 만들어 한 달 정도 발효시킨다. 메주는 한옥 황토방 발효실에서 유기농 볏짚에 매달아 발효시킨다.

잘 뜬 메주는 정월(음력 1월)에 말날을 받아 죽염수와 함께 항아리에 넣어 다시 발효시킨다. 메주가 잘 발효되면 메주만 분리해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켜 된장으로 만든다. 메주에서 우러난 죽염수는 분리해 항아리에 담아 간장으로 숙성시킨다.

국산 콩, 지하 150m에서 뽑아 올린 지하수, 담양 대나무와 서해안 천일염으로 만든 죽염을 사용한다. 전통 방식으로 옹기 항아리에서 발효시킨다.

간장은 1년 된 청장, 3~4년 된 중간장, 5년 이상 된 진장으로 나눠 판매한다. 오래될수록 색깔은 진해진다. 청장은 오이냉국이나 김밥, 묵채 등에 사용하고, 진장은 갈비, 흰죽, 전복, 육포, 김부각 등에 사용한다.



◆간장은 종가 상차림의 중심

양진제 종가의 장류에서 중요한 것은 천일염이 아닌 죽염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기순도 종부는 “죽염을 사용하면 장이 덜 짜고 감칠맛은 더해진다. 또 우리 죽염장은 일반 장과 달리 메주를 많이 사용하고 숙성 과정에서 간장을 많이 빼지 않아 된장 맛이 좋다"고 설명했다.

양진제 종가에서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제품(기순도 전통장)은 간장과 된장을 비롯해 고추장, 청국장, 조청, 쌈장, 장아찌 등 다양하다.

양진제 종가의 상차림에서 가장 기본이고 중심이 된 것은 간장이었다.

“반드시 간장을 제일 먼저 상에 올려야 했습니다. 시집와서 간장을 놓지 않았던 적이 있곤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새아가, 밥상에 간장이 빠졌구나. 어서 종지에 담아 오너라’라고 매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밥상에는 언제나 간장이 제일 먼저 올랐습니다."

종가의 이런 전통이 지금의 ‘기순도 전통장’이 있게 된 힘이 되었을 것이다.기순도 종부는 “장 담글 때는 초상 난 집이 있어도 문상도 안 가며 정성을 다하지만, 장 담그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할 수가 없다. 복잡한 과정 중 한 가지만 잘못돼도 제 맛을 못 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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