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청도군 화양읍 청도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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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24   |  발행일 2015-04-24 제38면   |  수정 2015-04-24
“목적·기능 달라진 복원…높이 겨우 1.6m 성벽에서 역사의 비극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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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으로 둘러싸인 청도 읍성의 공북루와 해자 격인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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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던 청도 읍성의 옛 성벽. 길 위쪽이 교촌리로 청도 향교가 자리한다.

지상으로 불려나온 바위가 슈트를 차려입는다. 눕힌 나무가 각화된 피부를 벗고 말간 살빛으로 다시 선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 건설한 형식 속으로 배치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형식의 전생을 알지 못한다. 복원이란 늙은 채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지만, 전생의 비극에는 아랑곳 없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노인처럼 태연하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일이다.

임진왜란·일제를 거치며
파괴되고 헐리고 방치돼
2007년부터 단계적 복원
밭둑 지지하던 낮은 석축
매끈한 돌들의 긴 벽 변신
평화로운 城서 내다보이는
화양 들녘의 풍경도 좋다

◆ 읍성, 청도의 옛 중심에 다시 서다

청도 읍성이 복원되었다. 아니, 재현되었다고 하는 게 좀 더 솔직한 감상이겠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매끈하고 젊은 모습이다. 수년 전 내가 본 읍성은 밭둑을 지지하는 낮은 석축에 불과했다. 표지판이 없었다면 민감한 학자의 눈에만 오래된 성벽의 일부로 감지될, 그런 돌무더기였다. 엉성했던 돌무더기는 탄탄해졌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돌들이 긴 벽으로 이어졌다. 사면은 잔디로 덮여 있고 좁은 돌계단이 군데군데 놓여 있으며, 계단을 오르면 성곽길이 멀리로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청도 땅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화양은 옛날 청도군의 중심 읍이었고, 1천880m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도로에서 만나는 8개 읍성 중 하나로, 성 안에는 민가와 함께 관아와 객관, 군기고 등이 있었다. 맨 처음 성을 쌓은 것은 고려 때라 한다. 그때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성이었다. 조선 선조 23년인 1590년, 성은 왜란에 대비해 더 높고 튼튼하게 쌓으라는 왕명에 의해 석성으로 다시 축조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성벽은 파괴되었고 동, 서, 북문이 소실되었다. 이후 성벽과 문루를 다시 세웠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시 제거되어 약간의 성벽과 기단만이 남게 되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청도를 관통해 놓였다. 지역 유림의 거센 반발로 철길은 읍성을 우회해 설치되었다. 화양읍에 있던 관공서는 청도역 주변으로 옮겨졌다. 무게 추는 청도읍으로 기울었고 버려진 도주관은 잠시 읍사무소로, 동헌은 교실로 사용되었지만 원형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후 청도 읍성은 100년 동안 방치된 채 야금야금 훼손되어가고 있었다.

청도 읍성의 복원은 2007년경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동문지에서 향교 방향으로 오르는 성벽이 복원 단장되어 있고, 읍내와 화양 들녘을 가르는 긴 성벽과 북문인 공북루가 재건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1.6m정도. 제대로 된 고증인가 싶을 정도로 낮다. 마치 전두엽이 손상된 것처럼 거듭되어온 비극의 기억은 느껴지지 않는다. 목적과 기능이 달라졌기에, 어쩌면 역사의 비극성이란 텍스트 속에만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청도 읍성에서 느끼는 것은 평화로운 안정감이다. 저 앞에 내다보이는 화양 들녘은 얼마나 보기에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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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읍내와 화양 들녘을 가르는 청도읍성. 오른쪽이 성 밖으로, 형옥이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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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선정비군. 객사인 도주관에 있던 것을 2008년 청도 읍성의 동문지 옆으로 이전했다.

◆ 억만고, 형옥, 읍성밟기…사라진 것들의 재림

동문지 옆 성벽 아래에는 청도의 선정비가 일렬로 서서 위엄을 과시한다. 동문 밖 구릉에 뼈대로 남아있던 석빙고는 지금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다. 동문 안에는 삯을 주고 민간의 말을 징발하던 ‘고마청’과 관아의 부속 창고로 추측되는 ‘억만고’가 세워져 있다. 읍성 안 북서쪽에는 ‘성내지’ 혹은 ‘성내제’로 기록되어 있는 연못이 있다. 화양의 남쪽에 우뚝 서 있는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어 두던 인공 연못으로 오랫동안 다만 못으로 잔존해 있던 것을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공북루에서부터 동북쪽 모서리까지의 성벽 아래에는 세 개의 연못을 조성했다. 일종의 해자인데 읍성의 조경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북서쪽 성 밖에는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형옥이 재현되어 있다. 죄인을 구금하고 형벌을 집행하던 감옥이다. 읍성 사람들은 북문으로 들고 나기를 꺼렸다고 한다. 죄인의 목을 치던 형장과 역병이나 괴질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위해 재를 올리던 여단이 북문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비 내리는 밤마다 원귀들의 곡성이 울려 퍼졌고,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정조 3년인 1779년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한다. 그것이 청도 도주줄다리기의 기원이다.

도주줄다리기는 시대에 따라 확장과 축소를 거듭했고 영남줄, 화양줄 등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으며, 지세누름에서 군민화합이라는 의미의 변화도 거쳐 왔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청도 읍성의 복원과 함께 매년 땅이 부풀어 오르는 초봄이면 읍성 밟기 놀이도 재연하고 있다. 복원, 복구, 재현, 재건, 무엇으로 불리든, 화양읍에서 사라졌던 것들이 재림하고 있다. 중심에 대한 향수이든, 힘을 향한 야심이든, 그 형식은 축제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대구 파동에서 헐티재 넘어 풍각면을 지나 화양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팔조령 지나 유호연지 방향으로 가도 된다. 동문지 앞에 있는 석빙고는 현재 복원 중으로 가림막이 쳐져 있다. 동헌은 화양초등학교 안에 위치한다. 동문지 앞에 주차장과 화장실 등 방문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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