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이름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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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8   |  발행일 2016-04-28 제30면   |  수정 2016-04-28
20160428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역사적 인물 권기옥·박경원
아명 ‘갈례’ ‘원통’에는
‘딸은 필요없는 존재’뜻 포함
이름은 또 하나의 정체성
신중하게 짓고 걸맞게 살자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땅을 벗어나 하늘을 날고자 했던 두 여인이 있었다. 권기옥과 박경원이다. 두 사람은 여성비행사라는 공통점 말고도 대구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은 대구 대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의 아내이고, 박경원은 대구 덕산정에서 태어나 신명여학교를 나온 대구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숨겨진 공통점은 아명(兒名)에 얽힌 사연이다. 지금은 권기옥과 박경원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권기옥의 아명은 ‘갈례’, 박경원의 아명은 ‘원통’이었다. 권기옥은 평안남도 평양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둘째 딸을 낳자 권기옥의 아버지는 딸은 필요 없으니 ‘어서 가라고’ 갈례라는 이름을 지어 부른다. 박경원은 이미 딸만 네 명이 있는 집안에서 내리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기다리던 아들 대신 또다시 딸이 태어난 것이 원통하다 하여 ‘원통’이라 불렸다고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딸은 빨리 가야 할 필요 없는 존재이자, 아들 대신 나온 원통한 존재였겠지만 진취적인 성격을 지녔던 두 사람은 부모의 바람(?)과 달리 한국여성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구적 존재가 된다. 만약 권기옥이 갈례라는 이름처럼 빨리 사라졌다면 최초의 여성비행사, 독립운동가, 한국 공군창설의 어머니라는 걸출한 인물의 활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박경원은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식민지’ 조국의 ‘딸’로 태어난 원통함이 창공을 날고자 하는 꿈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 가부장 사회에서는 후사를 잇고 제사를 지내줄 아들의 이름은 항렬과 음양오행, 기릴 뜻을 갖춰 공들여 짓는 반면, 딸의 이름은 앞의 사례처럼 아들 동생을 불러오는 명칭(섭섭, 종말, 후남, 끝순, 꼭지 등)이거나 태어난 환경이나 신체적 특징을 따서 쉽게 짓는 경우가 많았다. 삼월생이면 삼월이, 몸에 점이 있으면 점순이, 성격이 온순하면 엄전이,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아기….

얼마 전 각종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필자의 이름이 오른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검색어 순위에서 사라지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의 이름을 새삼 확인한 독자 분들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하실 거다. 동명이인인 재벌 3세의 갑질 논란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던 바로 그 일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에 안식년 가 있는 친구, 소원했던 지인, 선후배에게서까지 연락들이 왔다. 대부분 “물론 네가 아닌 줄 알지만 기사를 보니 놀랍기도 하고, 이름이 같아서 본의 아니게 당황했을 너에게 위로차 연락했다”는게 요지였다.

원래 집에서 부르는 필자의 이름은 착할 선(善), 예쁠 아(娥), 선아다. 딸을 낳고 부모님께서는 이름을 고르느라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달의 여신 항아(姮娥)처럼 선하고 아름답게 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으셨는데, 손자 아닌 손녀딸 보신 게 마음에 안 들었던 할아버지가 호적에 올리시면서 중간에 한 일(一)자를 넣어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딸은 하나로 그치라는 의미인지. 그 일로 부모님의 상심이 꽤 크셨는데, 지금처럼 개명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음에도 심각하게 개명을 고려하기도 하셨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에게서 동생 이름은 이선, 삼선이냐는 놀림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크면서는 이 이름이 내 운명인가 싶고 나름대로 이름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다. 그런 자긍심이 이번 사건으로 조금은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름은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새삼 내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으나 동시대를 사는 동명이인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말아야겠다 싶다. 재벌 3세 그분께서도 지금부터라도 그런 각오를 다지신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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