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鄕 경북, 문학관을 찾아 떠나는 여행 .4] 안동 ‘이육사 문학관’

  • 류혜숙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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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15   |  발행일 2016-11-15 제13면   |  수정 2016-11-15
‘광야’처럼 푸르고 너른 들 끝…시대의 ‘초인’ 기다리는 陸史
20161115
이육사 문학관 주변에 세워진 이육사 동상과 그의 대표작 ‘절정(絶頂)’이 새겨진 시비. 작은 사진은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육사 문학관. 2004년 육사 탄생 100년, 순국 60주년을 기념해 고향 원촌리에 지어진 문학관으로 현재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가 완료되면 문학관 관람 뿐만 아니라 교육 및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육사를 만나러 간다. 안동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오른다. 와룡면을 지나 도산면에 들자 길가에 포도밭이 보인다. 청포도 단지다. 올해 이곳에서 자란 청포도가 ‘264청포도와인’으로 태어났다. 육사의 유산이 투명하게 익어가는 길이다. 도산서원을 지나고 퇴계종택과 퇴계묘소를 지나면 육사의 고향 원촌(遠村)이다. 육사를 만나러 가는 길은 퇴계에서 육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육사 문학관
탄생 100년 기념 고향 원촌리에 건립
시집·육필원고·독립운동자료 등 전시
문학 교육·체험장으로 새단장 들어가
내달 완료…늦어도 내년초 방문 가능

이육사 선생은?
1904년 도산면 출생…본명은 이원록
광야·절정·청포도 등 詩 30여편 남겨
1944년 中베이징 감옥서 39세로 순국
수인번호 ‘264’ 그의 영원한 이름으로


#1. 새단장 하는 이육사 문학관

원촌마을의 초입에 이육사 문학관이 자리한다. 문학관은 육사가 태어난지 100년, 순국 60주년을 기념해 2004년에 지어졌다. 지금 문학관은 철근과 차단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사 중이다. 안동시가 2012년부터 추진해 온 ‘유림문학 유토피아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향후 문학관은 퇴계 이황에서부터 이육사로 이어지는 유림사상과 정신의 맥을 계승하는 문학 교육 및 체험을 위한 장소로 활용의 폭을 넓힐 예정이다.

문학관에 원래 있던 선생의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의 전시물을 비롯해 조선혁명군사학교에서의 훈련과 감옥에서의 생활 모습 등을 재현한 모형은 그대로 보존된다. 여기에 영상이나 전시 패널 등이 새단장을 한 후 새롭게 전시될 예정이다. 건물의 뒤쪽은 증축되어 ‘문학 정신관’이 들어선다. 이곳에는 전시시설과 다목적 홀, 사무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문학관의 뒤쪽에는 골짜기 쪽으로 길게 ‘문학 생활관’이 신축되고 있다. 20실 규모로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로 문학관을 찾는 관람객이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도록 꾸밀 예정이다.

원래 문학관의 뒤쪽에는 육사의 생가를 재현한 ‘육우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는 시 ‘절정’을 새긴 시비와 시인의 동상이 있고, 조금 더 깊숙이 오르면 청포도 샘이 흘렀다. 육우당은 문학관의 왼쪽으로 이전된다. 기존의 조경 시설은 큰 변화 없이 문학마당과 야외스탠드, 진입부 등이 정비된다. 문학관 앞에는 주차장도 들어선다. 문학관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공사는 올해 12월 중에 마칠 예정이다. 늦어도 내년 초에는 관람이 가능하다.

문학관의 오른쪽에는 육사의 묘소로 가는 길이 있다. 2.8㎞의 청포도 오솔길이다. 더러 거친 산길이고 40분은 걸어야 하는 숨찬 거리다. 군데군데 ‘이육사 묘소 가는 길’이라고 적힌 리본들이 걸려 있다. 그의 무덤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이리라. 곧 묘소 가는 길도 조금 더 안전하게 정비된다.

육사는 부인 안일양과 나란히 원촌마을 뒷산에 잠들어 있다. 두 개의 봉분 앞에 서 있는 하나의 묘비에 시인과 그의 부인 순흥안씨의 비명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저 아래로 멀리 들판이 펼쳐져 있고 낙동강이 아스라하다.

이육사. 39년 짧은 생을 살면서 일제강점기 무려 17번의 옥살이를 했고, ‘광야’와 ‘절정’ ‘청포도’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우리의 시인이다. 그는 1944년 1월,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시신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0년에야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으로 왔다.

#2. 시인의 고향 원촌

이육사 문학관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육사의 생가가 있던 원촌이다. 마을 이름은 1995년에 원천리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마을의 내력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여전히 원촌마을이라 쓰여 있다.

원촌은 퇴계선생의 5세손인 원대처사 이구가 정착하면서 ‘세간 명리는 뜬구름으로 여기고 속진과 치욕은 멀리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그윽하고 구석진 두메산골’로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의 조화가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 한다.

육사는 이곳에서 1904년 5월18일, 여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생가는 여섯 형제가 태어났다 하여 육우당이다. 고향 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지구로 구획되면서 많은 부분이 물에 잠겼다. 현재 마을에는 원대정과 원대고택, 사은구장, 목재고택, 원호정사 등이 남아 있다. 육사의 생가는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되어 보존되어 있고, 안동댐에는 육사시비 ‘광야’가 푸르고 너른 물 앞에 서 있다.

지금 육우당이 있던 터에는 ‘청포도’ 시비가 자리를 대신한다. 주변에는 화강석으로 된 포도알이 단단히 영글어 있다. 이 일대는 ‘이육사 시비공원’으로 정비된다. 잔디마당과 야생화정원이 들어서고 마을 앞에는 넓은 메밀밭이 펼쳐질 예정이다. 청포도 시에 나오는 ‘먼데’는 원촌을 뜻한다는 말이 있다. 먼데라는 시어를 쓰면서 고향을 생각했을 거라는 것. 지금도 노인들은 원촌을 ‘먼데’라고 부른다고 한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이다. 본명은 이원록, 자는 태경, 어릴 때는 원삼으로 불렸다.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고종이 폐위되는 고된 역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형제들은 모두 우애가 좋았고 대단히 똑똑했다 한다. 1927년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에 연루되어 육사의 4형제가 함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때 육사는 미결수 상태로 감옥에서 1년7개월을 보냈다. 수인의 번호는 264. 이것은 그의 영원한 이름이 되었다.

육사, 처음에는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썼다. 이어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를 사용했다. 1935년부터는 집안 어른의 권유에 따라 육사(陸史)가 되었다. 역사를 높고 평평한 땅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100년이 넘게 부르는 그의 이름에는 식민지 땅의 영원한 죄인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육사의 저항성과 문학적 기질, 그리고 집안의 성격은 퇴계의 학통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 고향인 원촌 역시 항일 투쟁사에 이름을 남긴 마을이다.

#3. ‘절정’의 시상지 ‘칼선대’, ‘광야’의 시상지 ‘윷판대’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는 ‘내 동리 동편에 왕모산’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모산은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를 뫼시고 몽진한 옛 성터’다. 청량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 끝자락이 단애를 이룬 지형이 왕모산으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10여개의 봉우리를 거듭 오르내려야 정상에 닿을 수 있다. 그중 선녀가 내려왔다는 칼선대(갈선대)는 육사의 시 ‘절정’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왕모산 등산로에서는 ‘등산로가 아니니 올라가지 마라’는 글귀를 만나게 된다. 잘못하면 천 길 낭떠러지에 발 디딜 수도 있지만 정상적인 길을 따르면 안전하게 칼선대에 닿을 수 있다. 칼선대는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면 너른 들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찬다.

문학관 남쪽에는 육사의 마지막 시 ‘광야’의 시상지인 윷판대가 있다. 윷판이 있는 절벽이라 윷판대라 부르는데, 조선시대부터 있던 것이라 추정된다. 문학관에서 윷판대까지는 ‘이육사 시상길’이 조성 중이다. 쉼터를 갖춘, 보다 안전한 길로 정비될 예정이다. 윷판대에 서면 구불구불 흐르는 낙동강과 물굽이에 들어찬 넉넉한 들판과 들판에 깃든 사람의 집들, 그리고 왕모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발아래는 절벽이다.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

베이징 감옥의 간수는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에게 육사의 죽음을 알렸다. 그가 달려갔을 때 육사의 옷은 피로 낭자했고, 그는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이병희가 육사의 눈을 쓸어내리자 그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전한다. 그가 고문을 당하고 순국한 형무소의 지하실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광야’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자유신문’에 발표되었다. 시로 쓴 유언이었다. 육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여행정보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25㎞ 정도 가면 도산서원이다. 서원 입구에서 다시 북향해 고개를 하나 넘으면 퇴계 종택, 거기서 1㎞ 남짓 더 가면 육사의 고향 원촌이다. 원촌마을 초입에 이육사 문학관이 자리한다. 문학관 리모델링 공사는 올해 마무리될 예정이며 내년 초에는 관람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원촌마을의 육사시비 공원과 문학관과 윷판대를 잇는 산책로 정비 등 문학관 주변의 종합 계획은 내년 9월 완료될 예정이다.

공동기획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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