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독자적 문화 형성·자치권 확보” 주장 뒷받침

  • 마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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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8   |  발행일 2016-11-28 제12면   |  수정 2016-11-28
■‘흙에 묻힌 역사’ 특별전
20161128
금동관모
20161128
대리리 45호 금제귀걸이
20161128
은제환두대도

조문국박물관 개관 4주년을 맞아 열리고 있는 네 번째 특별전의 의미는 남다르다. 전시 중인 유물 가운데는 조문국이 신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합병된 후에도 독자적 문화를 형성했으며, 동시에 자치권도 확보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금동관모와 금동장식= 금성산고분군 48-1호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신라관모에서는 드문 양식으로 정수리 부분에 짧은 봉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양식은 공주 수촌리 출토 관모(백제 5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백제의 관모는 정수리 부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아 금성산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백제계 관모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세환이식= 대리리 45호분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5~6세기 당시 제작된 최상급 금귀걸이로 의성지역 최고 지배층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환이식(가는 고리 귀걸이)은 청동으로 만든 귀걸이 형태에 얇은 금판을 말아, 접착면에 열을 주고 두드려서 마감한 뒤 ‘C’자형으로 말아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걸이 역시 의성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 귀걸이와 은제 관장식= 의성 대리리고분에서는 금동관모와 관모장식, 은제과식(허리띠), 은제과대금구(허리띠 장식) 등과 같이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위세품(권위를 나타내는 금은세공품)이 다량 출토됐다. 특히 금동제와 은제의 관장식이 이처럼 다양하게 출토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위세품= 무덤 주인이 사용했던 금제 귀걸이는 중앙이 허리처럼 잘록한 원통형의 중간식 아래에다, 넓은 심엽형(나뭇잎 모양) 누빔 장식(1매)과 작은 심엽형 누빔 장식(2매)을 양쪽에 매단 수하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런 양식의 귀걸이는 경주를 포함한 신라권역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경주 서봉총,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유사한 형태다.

▲의성양식토기= 5세기 무렵 의성양식토기의 특징은 굽다리접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단각 고배의 각단이나 대단을 돌대나 두껍게 단이 지도록 처리해 각단을 구분하고, 다른 지역 토기보다 길게 처리한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리리 45호분 주곽에서 의성양식과 경주양식 토기가 함께 출토됐다는 점이다. 이 토기들은 발굴 당시 의성양식 굽다리접시에 경주양식의 뚜껑을 덮었거나 경주양식 굽다리접시에 의성양식토기의 뚜껑이 덮여 있는 모습으로 출토됐다.

의성=마창훈기자 topg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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