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조선의 인재향’ 선산대로 <하>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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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17   |  발행일 2017-03-17 제39면   |  수정 2017-03-17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吉再 회한 새삼 떠오르는 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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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선생의 고향마을인 봉한리 마을 입구 논에 있는 충효열 3박자를 갖춘 선산삼강정려각과 봉한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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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내를 흐르는 단계천변에 있는 하위지 선생의 유허비각. 소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비각의 아우라가 압권이다.

‘장원방’의 선산은 언제 적부터 곱창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곱창을 잘 안 먹는 사람들의 눈에도 익숙한 선산곱창, 선산이 어떻게 해서 곱창브랜드의 면사무소가 되었는지는 선산시장 어느 식당 사장으로부터 듣고 알게 되었다. 식당 간판만 달고 곱창장사를 시작해서 장사가 잘되는 걸 본 어떤 음식업 사업가가 선산곱창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자, 후발 곱창브랜드 ‘대한곱창’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선산의 인재들이 곱창을 먹고 장원급제했다는 스토리텔링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선산시장 일대는 인물 여행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맛깔났다. 선산성당 주변을 구경하다 미처 챙기지 못한 사육신 하위지 유허비각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입구에 때깔나게 구부러진 와송의 자태는 구부려도 구부러지지 않고 빛난 선생의 인생을 표본해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선산시장에서 김재규 장군 본가를 찾아헤매며 건넜던 단계교나 도로명 표지판에 새겨져 있는 ‘단계서길’을 몰랐다. 집 앞 시냇물이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丹溪)’라 불렀다고 한다. 비봉산 아래 하위지 선생의 유허비각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산지식이다.

선산대로 일주만 해도 역사공부 끝
선산시장 일대 맛깔난 ‘인물 여행지’
충절의 삶 ‘사육신 하위지’유허비각

길재 배향한 금오서원은 한창 공사중
내친김에 선생 태어난 고아 봉한리行
들판의 삼강정려각이 冶隱 기억할 뿐

구미대교서 떠오른 박정희 前대통령
그의 생가 대신 동락서원으로 페달질
반전의 역사와 영남정신 되돌아봐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거사 실패로 능지처사의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에 대한 추앙은 사림의 심장에 새겨졌고, 이에 대한 입장은 사색당파가 뜻을 같이했다. 사육신의 역사적 부활을 가능케 한 서사는 ‘사육신 충신론’을 제기한 생육신 남효온의 추강집에 실린 ‘육신전’이었다. “누가 신하가 아닐까마는 지극하다 육신의 신하 됨이여! 누군들 죽지 않을까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는 임금 사랑의 신하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는 임금 충성의 신하 절개를 세웠도다.”

민간에서 알음알음 전해오면서 읽어오던 금서(禁書)였던 ‘육신전’은 사림들의 애독서였던 모양이다. 세조는 “네가 항복하고 역모를 하지 않았다고 숨기면 살 수 있다”고 단계를 회유했으나, 그는 “이미 저에게 반역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죽이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고 영원히 사는 죽음을 택한다. 추강은 단계를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세종이 배양한 인재 가운데 문종 때에 능력을 꽃피운 으뜸 인물로 하위지를 꼽았다.

사육신 사건 연루자들의 절의를 추숭(숭상)해야 한다는 조직적인 움직임은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충신·의사는 이미 군신의 분의를 정하고 나면 다시 달리 변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충의는 만고에 없어지지 않는 것이며, 신 등이 당대에 포양(褒揚)하고자 하는 까닭은 신하로서의 지조를 권려(勸勵)하려는 것입니다.”(중종실록, 중종 12년 1517년 8월8일)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도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마침내 숙종은 “여섯 사람을 복작(復爵)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면서 관작과 명예를 회복했다. 숙종대의 추숭 전례에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사육신의 복권은 노론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어 숙종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 후 235년이 지난 1691년 숙종 17년 12월6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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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여헌 장현광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동락서원. 구미대교 아래 낙동강변 임수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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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을 찾아가는 금오서원길 화조리 들판을 달리며 고아읍 쪽을 보니 무엇이든 꽃 피울 수 있는 ‘빈 들’이 보였다.

하위지는 영조 34년(1758)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호는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가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인데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공직자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관료의 사후에 직급을 높이는 일)한 호이다. 또 정조 때에는 장릉 배식단 정단에 배향된다. 장릉 배식단은 조선조 제22대 정조 15년(1791년 2월21일)에 어명으로 강원도 영월의 단종 묘역인 장릉 경내에 충신각을 건립하고 단종과 관련된 충신 268명의 위패를 정단(正壇)과 별단(別壇)으로 나눠 봉안하도록 한 곳이다. 사림들은 그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여 서산서원과 월암서원을 세웠다. 봉건 조선이라 누대에 걸쳐 이루어진 감개무량한 장면이다. 이러한 반전이 역사의 진실 아닐까.

선산시장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노상리 마을회관에 들러 기념비 같지 않은 박녹주 인생백년 노래비를 만났다. 박녹주 기념비가 노상리에 세워진 연고는 그의 인생처럼 떠도는 바람 같은 이야기로 남을 것 같다.

두 바퀴 포토바이킹은 선산대로에서 되돌아봄과 보살핌의 역사 속으로 달리고 있는 중이다. 선산시장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장엄 미사풍 레퀴엠으로 다가왔다. 충절과 절의 및 지조를 숭상한 영남학파의 선구자는 야은 길재다. 성현이 용재총화에 쓰기를 “길재 선생은 고려가 멸망함을 통탄하여 벼슬을 던지고 선산의 금오산 밑에 살면서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은 군(郡)의 여러 생도를 모아 두 재(齋)로 나누었는데, 양반의 후손들을 상재(上齋)로 삼고 마을의 천한 가문의 아이들을 하재(下齋)로 삼아, 경(經)·사(史)를 가르치고 근(勤)·타(惰)를 시험하는데 하루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백수십 명이었다”고 했다. 야은은 영남사림의 전통으로 낙향 후 인재양성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다. “높은 문관의 벼슬과 장수의 위세를 뜬구름같이 보고 은거하니”(매헌 권우) “금오산 아래 사는 저 길충신은 천고에 높은 이름 귀신도 감동하네.”(면앙정 송순)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선생의 학덕을 듣고 자란 남효온은 금오산을 찾아 “서하의 풍속이 선생의 교화로 방정하니 지금까지 영남에는 이름난 선비 많다네”라고 노래했다.

길재 선생을 배향한 금오서원은 선산읍성 낙남루를 지나 4㎞ 거리 낙동강변 원리마을에 있었다. 서원은 선생의 높고 깊은 덕을 잘 기려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하늘 아래 있었다. ‘금오서원봉안문’을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야은 선생은 충효가 겸전(兼全)하고 더욱이 성리학으로서 사문(斯文)에 유공(有功)하며 이제 선생의 종로지(終老地)인 금오산록(金烏山麓)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여 향사(享祀)의 곳으로 삼고 제학생(諸學生)의 장수(藏修)의 곳을 두게 하면 인륜을 교화하고 풍속을 성화시키는 방법에 보익(補益)이 있을 것입니다.”

금오서원은 사림들이 선산부사에게 건의를 하고 경상감사의 라인을 타고 건립된 숙원사업이었다. 구미시에서 한창 보강 공사를 하고 있는데 시·도민이 즐겨 찾을 수 있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큰 인물을 길러내고 살다간 선산대로는 이렇게 큰 뜻대로였나! 다음 행선지는 길재 선생의 탄생지인 고아읍 봉한리로 이어졌다. 빠른 길을 더듬으니 남산 아래 남산교를 지나고 관심1교를 거쳐 선산대로로 합류하는 지름길이 열렸다. 봉한교를 건너 선산대로 577 주택을 지나자마자 전주가 서 있는 논길로 내려가면 선산삼강정려각이 있다. 구미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에서 작성한 문화재청 우리지역 문화재 삼강정려각 정보를 보고 고아읍 봉한리 915-3 번지수를 찾아가면 봉한1리 마을회관 근처에 도착한다. 선산삼강정려각을 찾아야 된다. 선산삼강정려각은 봉한리에서 난 충신 길재, 효자 배숙기, 열녀 약가를 기리기 위해 정조 19년(1795)에 세운 비각이다. 선산은 사림들의 서원으로 구중궁궐이 부럽지 않은 곳으로 빛났다.

봉한리를 자전거 타고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길씨는 간데없는 마을이었다. 선생을 기념하고 있는 고향은 대로변 들판의 선산삼강정려각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 몇 그루뿐이었다.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린 금오산의 채미정으로 갈 데까지 가보자!

지산샛강생태공원으로 들어갔다 들판길을 따라 구미 낙동강자전거길로 들어가 야은로43길로 이어지는 덕산교에 도착해서 금오산도립공원에 있는 채미정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체력의 한계로 포기했다.

비산체육공원, 강변체육공원을 지나고 구미대교에 섰다. 구미에 오면 비가 오지 않아도 생각나는 그 사람,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떠올랐다. 구미대교는 절의와 편의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구미대교를 사이에 두고 내 마음은 지척에 있는 여헌 장현광 선생의 동락서원으로 기울었다.

2005년 10·26 사건을 소재로 만든 임상수 감독의 블랙 코미디 영화 ‘그때 그 사람’을 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오더니 일행에게 “근데 박정희가 누고?”라고 묻는 소름 돋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 입장 없음이 주는 공포의 충격이었다. 모른다는 것이 저렇게 순박한 영혼을 갖게도 하는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했다. 국정교과서를 써서 당신의 이념을 강요하려는 사람들에게 영남에서는 번거롭게 국사책을 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선산대로 일주만 해도 역사공부 끝난다. 후손을 위한 역사교육을 하려면 안전요원 충분히 대동하고 영남대로를 라이딩 하라고 당부한다.

선산대로에서는 시간과 속도의 제한을 받는 자전거에 불편을 느꼈다는 말로 영남사림 인물여행지로 찬양하고 싶다. 어느 고을에 사육신과 생육신을 겸비한 절의지향이 있을까. 그 전통 면면히 이어져 근현대사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다문화시대에 우물 안 국사를 가르치겠다는 돈키호테학교가 선산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선산대로를 ‘홀라’하니 흐릿했던 영남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움켜잡을 수 있었다. 장엄 미사곡을 듣고 달리면 좋을 이 레퀴엠 같은 길은 얼마나 스피리추얼한가. 반전의 역사를 위해 뒤돌아보고 또 돌아봄이 필요한 구미대교에서 한강을 넘어선 낙동강물을 보았다. 아직도 탄핵기각을 부르짖는 분께는 금오산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법을 부탁드리고, 탄핵인용을 선택한 대구·경북엔 영남정신표 사림정치의 부활을 당부한다. 버스 타고 포토바이킹 첫 도전은 구미에서 선산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게 했다.

인물 갤러리 ‘이끔빛’ 대표 newspd@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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