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개의 이야기] 페루 쿠스코(Cuzco)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6-09   |  발행일 2017-06-09 제37면   |  수정 2017-06-09
종이 한 장 끼울 틈 없는 ‘12각 돌’에도 잉카가 숨 쉰다
20170609
포석이 깔린 길과 석벽이 만드는 쿠스코의 골목.
20170609
잉카인들의 석조 기술과 미의식을 보여주는 12각 돌.
20170609
아르마스 광장 전경. 왼쪽이 쿠스코 대성당, 오른쪽이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20170609
잉카제국의 요새로 추정되는 사크사이와만 유적지. 이곳에서 매년 태양의 축제 ‘인티라이미’가 열린다.
20170609
사크사이와만에서 조망한 쿠스코 전경.

나의 남미 여행 꿈은 잉카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마추픽추 유적으로 대표되는 잉카제국의 신비는 어릴 적 ‘어깨동무’나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에서 처음 접한 듯하다. 그 기억이 제법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나보다. 나이 들면서 점점 버킷 리스트 앞머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남미 여행은 간단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대륙인데다가 모든 것이 정반대이다. 남반구에다 시차도 12시간이니 정확히 한반도와 대척점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직항도 없어서 가는 시간만도 이틀이 걸린다. 그러니 안 가거나 못가는 사람은 많아도 여행기간이 한두 주에 그치는 사람은 드물다. 결론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비용도 적지 않게 드니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오십대 중반. 더 늦으면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아 큰 용기를 냈다. 어느 봄날 마침내 가을 속으로 떠났다. 인천을 출발하여 도쿄와 휴스턴을 거쳐 이틀 만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했지만 쿠스코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1시간30분을 더 비행해야 했다.

지구 반대편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한때‘세계의 배꼽’이자 잉카제국 수도
잉카의 초석위에 지어진 유럽풍 건축들

아르마스광장의 100년 걸려 지은 대성당
銀 300t 제단·마르코스 사파타 聖畵 눈길
광장서 남동쪽의 가장 번화한 엘솔거리
'태양의 신전’ 자리엔 산토 도밍고 교회

'잉카의 요새’로 여겨지는 사크사이와만
매년 6월24일 ‘태양의 축제’열리는 곳
350t 돌 등 정교한 석조기술 연신 감탄


안데스 산맥 해발 3천399m에 자리잡은 쿠스코는 여러 가지로 가슴을 자극했다. 어디선가 잉카의 슬픔을 담은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의 선율이 말타(Malta, 팬파이프의 일종)에 실려 나온다. 희박한 산소 때문인지 마침내 왔다는 감격 때문인지, 아니면 잉카제국의 비극 때문인지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접시 같은 분지에 정갈하게 담겨있는 도시의 첫인상은 그렇게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쿠스코는 한 때 백만 명이 살았던 옛 타완틴수요, 즉 ‘잉카제국’의 수도였다. 유럽인들이 잉카제국이라 부르는 타완틴수요는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는 안데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 제국의 왕을 ‘잉카’라고 불렀는데, 유럽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제국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쿠스코는 원주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다. 문자와 종이가 없었던 이 제국은 구전에 의하여 그 역사가 전해오는데, 잉카의 신화에 의하면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과 그의 누이 마마 오클로가 1200년 경 쿠스코를 세웠다고 한다. 쿠스코가 타완틴수요라는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438년 만코 카팍의 18세손인 파차쿠티 왕 때부터이다. 그는 사피와 툴루마요 강에 수로를 만들고 그들이 신성시했던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쿠스코의 건물들은 잉카의 뼈에 스페인 정복자의 살이 붙어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침략자 피사로가 이 찬란했던 제국을 멸망시키고 300년 넘게 식민통치를 했지만 그 뼈대는 없애지 못했다. 식민 통치자들은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 자리에 유럽풍의 궁전과 종교 건축물을 세웠다. 쿠스코 대성당,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산토도밍고 교회 등이 스페인이 붙인 살이라면 비라코차 신전, 와이나 카팍 궁전, 코리칸차 신전 등은 그 살을 지탱하는 잉카의 뼈이다. 살은 겉모양이어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뼈는 그 안에 숨어 있으므로 느껴야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만든 스페인풍의 이 도시가 왜 다른 스페인 도시와 이토록 다를까? 나는 그 해답을 잉카의 뼈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이제 보고 느끼러 가자! 이 도시의 여정은 아르마스 광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시의 중심지이자 쿠스코를 상징하는 대표적 볼거리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잉카시대의 비라코차 신전 자리에 세워진 대성당이다. 1650년에 발생한 대지진을 거치면서 건축기간만 100년이 걸렸다는 이 성당은 잉카의 흔적을 없애고 식민시대를 여는 상징이었다.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이나 세비야 대성당에 견줄 수는 없지만 제단을 만드는 데만 은 300t을 쏟아 부었다고 하니 잉카를 지우려는 정복자들의 대역사였던 셈이다. 또 이 성당 안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코스 사파타의 ‘최후의 만찬’ 성화에는 이교도를 향한 전도의 집념과 놀라운 순발력을 볼 수 있으니 식탁 위의 만찬에 이곳의 전통 음식 ‘쿠이(쥐처럼 생긴 기니피그의 일종)’를 그려 넣었다. 대성당과 함께 기역자로 광장을 만들어주고 있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이다. 역시 잉카 11대 황제 와이나 카팍의 궁전을 부수고 세웠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종탑과 섬세한 외벽 부조로 옆의 대성당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비교적 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쿠스코에서 가장 번화한 엘솔 거리를 만난다. 이곳에 있는 산토 도밍고 교회도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를 부수고 세운 스페인의 살이다. ‘코리’는 케추아어로 ‘황금’, ‘칸차’는 ‘울타리’를 뜻하니 ‘황금 울타리’이다. 이름처럼 잉카제국 시대에는 벽에 폭 20㎝ 이상의 황금 띠가 둘러져 있었고 문과 지붕 등도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스페인이 남긴 자료에 따르면 신전 전체가 눈부신 황금빛이었으며, 이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금 장식을 모두 떼어 스페인으로 가져갔는데 갑자기 유입된 황금 때문에 유럽에 인플레가 왔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고 했다. 이 신전을 부수고 남은 뼈대 위에 세워진 산토도밍고 교회는 1650년에 일어난 쿠스코 대지진 때 다 무너졌고, 다시 증축된 교회도 1950년 때 대파되었지만 그 뼈대인 석벽만은 뒤틀림 하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회는 거꾸로 잉카인의 뛰어난 석조 건축술을 대변하는 건축물이 되고 있다.

잉카인의 석조 건축술을 가장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12각 돌’이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지않은 아툰 루미요크 거리는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곳에는 종이 한 장 끼울 수 없이 정교하다는 12각 돌이 있다. 돌의 모양대로 깎았을 테지만 그 정교함에 놀라고, 그 미의식에 또 놀라게 된다. 이런 석조 벽이 만들어내는 골목의 풍경이야말로 이곳이 잉카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잉카의 ‘느낌’이다. 이처럼 쿠스코의 골목길은 잉카의 뼈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좀더 잉카를 느끼고 싶다면 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시장으로 가보는 것도 좋다. 쿠스코에서 가장 큰 산 페드로 시장은 아르마스 광장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다. 채소와 과일, 공예품, 각종 음식을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늘어선 시장건물 안도 재미있지만 이곳에 세를 얻지 못한 가난한 원주민 상인들이 만드는 난전은 더욱 흥미롭다. 직접 기른 채소나 나물, 꽃 등을 파는 익숙한 모습에서부터 앞서 언급한 ‘최후의 만찬’에서 튀어나온 듯한 통 ‘쿠이’나 소의 심장으로 만든 꼬치 안티쿠초, 치차 같은 각종 전통 음료, 동물 껍질을 튀긴 정체불명의 간식까지 기괴하고 이색적인 장면들로 지루할 틈이 없다. 자기 덩치만한 큰 보따리를 짊어진 원주민들과 그 보따리를 풀어서 만든 이러한 난전들은 고단한 잉카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하지만 구릿빛 피부의 작은 체구에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그들의 인상은 쿠스코의 석벽처럼 단단하고 굴하지 않는 모습이다.

잉카의 대표적 유적지 마추픽추가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살이 붙어 있지 않은 쿠스코 근교의 남겨진 잉카 유적들, 즉 온전한 잉카의 ‘뼈’들을 보게 되면 잉카제국의 위엄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잉카의 요새로 추정되는 사크사이와만이 대표적인데, 이곳은 쿠스코의 전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곳의 석벽을 뜯어 쿠스코 중심가의 성당이나 관공서 등을 짓는데 사용했는데, 다행히 큰 돌들은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큰 것은 9m 높이에 350t에 달한다고 하니 옮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매년 6월24일 이곳에서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꼽히는 태양의 축제 ‘인티라이미’가 열린다. 그 외 길흉을 점치는 신전 켄코, 붉은 요새 푸카푸카라, 성스러운 샘이 있는 탐보 마차이, 계단식 농경지 피사크 등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잉카 유적지이다. 통합입장권을 구입하면 이러한 유적지와 쿠스코 시내의 6개 박물관을 입장할 수 있다.

아나운서 출신의 여행 작가 손미나는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라는 페루 여행서에서 “일생에 한 번쯤은 페루 땅에 발을 딛고 쿠스코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푸르름을 다시 한 번 내 두 눈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이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나는 이 말로 이야기를 끝맺어야겠다. 대구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