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르네상스’와 코리아 콘체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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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0   |  발행일 2018-05-10 제38면   |  수정 2018-05-10
‘폐허에도 바흐의 음악이…’
6·25전쟁때 문화예술 메카
대구분위기 보여준 인용구
잡지기사의 원문에는 없다
출처·원전확보 중요성 입증
[여성칼럼] ‘르네상스’와 코리아 콘체르토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폐허에도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6·25전쟁 중 음악다방 ‘르네상스’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음악을 듣고 타전했다는 외신이란다. 당시 문화예술의 메카였던 대구의 분위기와 위상을 잘 말해주는 인용구다. 그 토대를 바탕으로 지난해에는 대구가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대구 시민으로서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음악사학자 손태룡 선생님과 환담을 하다가 이 외신이 실린 원전(原典)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난 음악전공자도 아니고 문화전문가도 아닌데 물론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손 선생님도 지금까지 이를 직접 확인한 적이 없다고 했다. ‘에튀드’라는 미국 음악잡지에 실렸다고 하는데, 이도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을 뿐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럼 대구에는 이 외신이 어디에 실린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건가? 대구경북연구원 오동욱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오 박사 역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명색이 대구가 음악창의도시라면서 너무 아카이브 작업에 소홀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대구음악협회에 건의하겠다고 한다. 호기심이 동해 구글 검색을 했더니 ‘에튀드(The Etude Magazine)’는 1883년 창간되어 1957년까지 발행된 음악잡지로, 기사색인집도 발간됐고 아마존에서는 몇몇 과월호를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지난주 오동욱 박사에게서 반가운 문자가 날아왔다. 에튀드 잡지에 실린 르네상스 관련기사 사진파일이었다. 대구음악협회에서 미국에 직접 연결해 자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활자가 뭉개지고 희미해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당시 르네상스의 실내 스케치와 레코드판을 얹고 있는 주인장 박용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겨울 어느 추운 밤, 우리는 대구의 뒷골목 후미진 가게에서 자욱한 담배연기와 전등불 아래 자리를 잡고, 몇몇 미국 사람과 스무 명 남짓의 한국인들과 함께 만국공통어로 연주되는 공연을 들었다.” 기사는 1953년 10월호(Vol.71, No.10)에 ‘코리아 콘체르토(Korea Concerto)’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시점으로 보면 1952년 겨울, 대구 향촌동의 르네상스 탐방기인 셈이다. 고 박용찬씨가 전쟁 중에 레코드 4천장을 싣고 와서 대구에서 르네상스의 문을 연 것이 1951년 가을이니까 개업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기사를 썼던 미군 로버트 엘킨스와 게리 젠닝스는 그날 저녁 르네상스에서 리스트, 그리그,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었으며, 카네기홀과는 비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카네기홀 공연보다 ‘르네상스’에 모인 관객들의 감상태도가 더 훌륭했다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의 콘서트홀이 또 다른 카네기홀이 되기에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다방은 평범한 미국 가정의 거실보다도 작았다. 모든 음악은 레코드음악이었고 오래된 레코드판이 낡은 축음기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뚜껑이 달린 석탄 난로가 방안의 유일한 난방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뒷골목 이 작고 허름한 가게가 남한 전역에서 음악의 성지(a shrine for music)가 되고 있다.” 기사 내용을 아무리 찾아봐도 “폐허에도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소개했다는 외신 내용은 없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음악은 전쟁 중에도 살아있다”라고 쓴 것으로 알려졌던 에튀드의 기사는 맥락은 같지만 정확한 인용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다 보면 많은 오류를 접하게 된다. 잘못된 인용구가 거듭 재인용되면서 사실로 굳어지는 사례도 많고, 원전 내용은 사라지고 출처 없는 재인용만 남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카이브 작업에서 자료수집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출처와 원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에 전문가에게 질의했던 내용이 대구음악협회의 수고와 노력을 거쳐 새롭게 정리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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